마태복음 1장 23절 성탄절

2019-12-24 09:32:41


마태복음 1장 23절 빌립보서 2장 8절

크리스마스 성탄 예배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2019년 12월 25일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빌립보서 2장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저희들은 늘 옛날의 아름다웠던 행복했던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기억하곤합니다. 그 때에는 그것이 고생이지만 그것이 행복이고 추억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크리스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과 기업과 공공단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정현종의 방문객의 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시집,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 2008.

예수님이 이땅에 온다는 것은 어마 어마한 일입니다. 구약과 예언과 예수님 오신 당신의 현재, 그리고 우리의 삶가운데 있을 미래의 사건까지 오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고 인격이 오기 때문입니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예수님의 모습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온다는 것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사건중에 사건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성도들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사연과 삶의 흔적들이 온것입니다. 아픔 가지고, 그리고 슬픔을 가지고, 고통을 가지고 온분들도 있고 행복과 사랑을 가지고 온분도 있습니다.

저는 가장 귀한 분이 예수님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세상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위인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공자, 소크라테스, 마호멧, 슈바이처, 간디, 이순신장군, 세종대왕등 많은 사람들이 이땅에 왔지만 다시 오셨으면 좋을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교회에 아기예수님으로 아니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든지 주님을 환영하고 모셔들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하고 모셔들일까요?

1. 예수님의 탄생의 성경적인 의미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사야 7장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구약의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700년 전에 예언적인 말씀이 이루워졌습니다.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묘한사람입니다. 모사라고 하였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전능하시는 하나님이라고하였습니다. 능력이 있고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영원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평강의 왕입니다. 전쟁이 없고 평화롭게 살수 있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떤 아기가 이땅에 오셨을 때에 이러한 수식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여러 왕들이 대통령들이 태몽이 있었다고 하지만 오래전부터 예언되었고 그리고 그분이 오셨을 때에 이렇게 놀라운 사실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3 ㅅ’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첫째 시옷은 생업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갈 때에 먹고 살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직장 돈벌이를 가지고 때어난다고 합니다. 어는 분이 갑자기 아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고 식생활을 계선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되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삶은 강물에다가 떡을 던지면서 살아가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생업보다 중요한 것이 생명입니다. 자신의 생명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잃기 전에 생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부자처럼 모든 것을 얻었지만 하나님이 그 생명을 오늘 밤에 대려가지면 그 예배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또다른 시옷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입니다. 여러분 생업도 있고 그리고 생명도 있지만 우리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어렵다고하더라도 선교하고 그리고 어떤 분들은 선교사로 나가서 순교도 하고 헌신도 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업보다더 생명보다더 사명을 위하여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참고) 불교의 부처님의 탄생신화

마야부인의 태몽(胎夢)에 등장하는 여섯 개의 상아가 달린 흰 코끼리는 옛부터 상서로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성인(聖人)이 태어나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마야부인이 해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는 어느 봄날, 룸비니라는 동산에서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잡으면서 부인의 옆구리로 부처님께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이 옆구리 탄생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어떤 분들은 마야부인이 제왕절개를 했을 것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기도 하는데, 정말 이 부분은 상징성이 큰 장면입니다. 옛날 인도에서는 인류탄생에 관한 신화가 있었습니다. 뿌루나(puruna)라는 태초의 원인(原人)으로부터 사성계급(四姓階級)의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즉, 원인의 머리에서는 종교를 비롯한 정신세계의 영역을 담당하는 사제계급 브라만들이 나오고, 옆구리에서는 왕족과 무사들인 크샤트리아 계급이, 배에서는 평민으로 생업에 종사하는 바이샤 계급, 발에서는 노예계급으로 수드라가 탄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옆구리 탄생은 왕족계급인 크샤트리아를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셨는데, 섰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스스로 존귀하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스스로 선 존재, 그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고 세계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인 것을 선언하는 상징입니다. 여기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벗어나는 일곱 번을 의미합니다.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루는 분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 왜 베들레헴입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대하여 나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라는 사람의 족복을 쭉 올라가면 다윗이 나오고 아브라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줄기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므로 로마 황제의 명을 받아서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가게 된것입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곳이 베들레헴이였습니다. 다윗의 증조부 릇과 보아스도 베들레헴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 5장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저는 남양홍씨 38대손입니다. 우리 사모는 영천 이씨라고합니다. 남양이라는 동내, 영천이라는 돈내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과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2. 그리스마스의 영적인 의미는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사야 7장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정경주 사모는 하나님이 하셨어요 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당한 삶의 모든 순간은 사람이 행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는 내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녀는 대한항공 국제선 승무원 시절의 어는 날 비행기가 일본 상공위에 지날 즈음에 갑자가 조종실에서 아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승객여러분 여객기 우편 날개 엔진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승무원과 승객 전원은 비상착륙준비를 마치고 착석해 안전벨트를 매주십사요. 평소 그녀의 신앙을 못마땅해 하며 신이 없다고 떠들던 남자 승무원이 달려와 털썩 그녀 앞에 무릎을 끓고 애원했습니다. 미스 정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그녀가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기도소리가 끝나자 아내방송이 다시 들렸습니다. 승객여러분 안심하세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우편 날개 엔진의 원이 모를 불이 저절로 꺼졌습니다. 곧 김포공황에 안전하게 도착하겠습니다. 승객분들은 환호성을 지렀습니다. 그러나 남자 승무원은 여전히 받ㄱ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깨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변호사로 있을 때에 의뢰인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쪽제비가 닭을 훔쳐 먹고 죄목으로 원숭이 판사의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쪽제비는 머리 좋은 여우 변화사를 채용했습니다. 여우 변호사가 보내 쪽제비가 닭을 훔쳐 먹은 것이 틀림없는데 어떻게 변호를 하지 하고 곰곰기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변호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장님 쪽제비가 닭을 훔처 먹은 증인이 3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기 보지 않는 증인이 백도 넘고 천도 넙습니다. 그러므로 쪽제비는 무죄입니다. 결국 원숭이 판사는 여의의 논리에 넘어가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는 재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 예수님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100% 승소할 수 있는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counciler라고 하였습니다. 변호인 돕는 사람,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내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을까요?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좋은날 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변화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머릿속에서는 변화가 잃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산에 오른 것은 좋은 일입니다. 건강에 좋고 그리고 마음적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내 건강이 나빠지지 않는 이상이 절대로 산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성미산이라는 힘이 저항하는 세력이있기 때문입니다. 올라갈 때에 힘들고 귀찮고 고달프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분명히 잘 알수 있습니다. 홍해의 기적도 보았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바윗을 처서 물이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담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냐 만나지 않는냐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느냐 가까이 하지 않는냐는 것입니다.

시편 73편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3. 크리스마스의 영적인 의미

빌립보서 2장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요한복음 1장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이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이 이땅에 내려왔는데 그를 깨닫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기 위하여 자기 비움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땅에 내려오셔서 많은 고통과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어려운 일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요, 둘째는 타인에게서 받은 해를 잊어버리는 것이요, 셋째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어려움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만 먹어도 살찐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체질적으로 살찌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살을 빼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것이 살을 찌우는 것입니다.

또한 어려운 것이 있는데 자기의 비움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자기를 비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자기 비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붇잡고 자기 집 고향 본토 친척의 집을 떠나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를 때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스승을 쫒았습니다. 예수님의 그의 제자 베드르를 부를 때에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쫒았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세관에 앉아 사무를 보고 있던 마태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태는 즉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 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누가복음 5:28)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하나님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자기를 비우셨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까? 왜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육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온갖 고난과 고초를 겪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비우셨다’라는 단어는 성경언어로 케노시스(Kenosis)인데, 이 말은 얼굴을 깎았다는 뜻입니다. 얼굴의 가죽을 벗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조각가가 칼이나 정으로 조각할 돌을 깎아내듯이,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얼굴을 깎아내셨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깎아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비움이라는 말은 스스로 체면을 깎아 내렸다는 뜻이고, 스스로 자기의 명예를 벗어던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조각가의 칼이나 정이 조각품을 깎아낼 때, 그 조각품이 겪는 아픔과 같은 아픔과 고통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심으로 예수님께서 얻으시는 것은 비움에 대한 영광이나 칭찬이 아닙니다. 비우심에 대한 찬양이 아닙니다. 고난과 모욕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는 비우는 데에서 교회다운 모습이 보여집니다. 성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움으로서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신앙인답다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비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비워야 한다는 말에는 이미 채워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채워져 있지 않으면 비울 수가 없습니다. 채워져 있지 않는 것은 비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몽골에서 선교하고 계신 이용규 선교사님이 쓰신 『내려놓음』이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우리 신앙인들 사이에 내려놓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롭게 인식되었습니다. 이 내려놓음이라는 말이 자기 비움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물건을 쌌을 때에 그것을 계산대에 내려놓을 때에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된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것을 끝까지 분들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아들과 물건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고 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불하여 내것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이 놓아질 때에 배추에 맛이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가 놓아질 때에 이사회에 맛이 나는 것입니다. 소금은 자신의 형체가 없어지지 만 설탕은 자신이 놓아질 때에 자신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 놋그릇도 있지만 하나님이 귀하게 쓰는 그릇은 깨끗하 그릇입니다.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속이 빈 나팔과 피리가 공명을 통하여 소리가 나듯이 우리의 속에 비었을 때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을 비움을 통하여 해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비우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불교처럼 자기 비움은 악한 정령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자기 비움은 성령이 임제하여 내속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날입니다. 이 날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