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장 20절 간절한 기대와 소망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2026년 7월
개역개정 빌립보서 1장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부모님의 가장 큰 소망은 언제나 자녀가 행복하고 평안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보다 더 사회에서 성공하고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이 사는 것이 간절한 기대와 소망입니다.
부모님들은 자신은 못 먹고 못 입으면서도 자녀의 교육비만큼은 어떻게든 마련하셨습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대한민국에서 부모님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들을 키워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대와 소망
일제강점기 (독립의 소원) 주권을 빼앗긴 암흑기에는 오직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되찾는 것만이 온 겨레의 유일한 염원.
전쟁의 종식: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는 피란과 학살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 가장 간절했습니다.
분단과 전후 (통일의 소원): 전쟁으로 가족과 땅이 두 동강 난 직후에는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나고 하나의 온전한 나라를 이루는 통일이 민족적 과제였습니다.
1960~80년대 (경제 부흥의 소원): 폐허가 된 땅에서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일념으로 경제 발전에 모든 국력을 쏟아부었습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의 수많은 가르침은 겉보기에 매우 다양해 보이지만, 말씀하신 대로 그가 강조하는 ‘돈, 섹스, 권력’이라는 3가지 거대한 유혹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집중하고 싸우는 대상은 바로 ‘돈(탐욕)’입니다.
돈이야말로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가장 쉬운 강력한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이겨내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가 외치는 단 하나의 목적, 즉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 아시아 출신의 성공한 비즈니스 여성 (루디아)의 헌신으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 헬라(그리스)인 여종 (치유받은 여인) 정부의 말단 간수의 헌신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것, 그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의 위대한 시작이었습니다.
- 우리 성원순복음교회는 원복래 안수집사님의 헌신으로 인하여 김재복집사님의 헌신과 수고로 지금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새벽마다 밤마다 매일 기도해주시는 루디아와 같은 양순옥권사님과 그리고 정연준 최해금권사님의 기도로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주후 63년 경에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던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가 보내온 선교헌금을 받게 되었고 빌립보 교회의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들을 에바브로디도를 통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이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옥중서신을 빌립보 교회에 쓰게 되었습니다.
가택 연금(Custodia Libera)(사도행전 28:16, 30).
지하 감옥이 아니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방세와 식비가 필요했는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헌신으로 에바브로 디도의 도움으로 나의 쓸것을 체우시는 성도에게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을 수발하러 왔던 에바브로디도가 수개월 걸려서 왔을 때에 죽을 병으로 고생하게 되었고 (빌립보서 2장 27절) 질병이 잘 치료되어 이제 감사와 기쁨의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그 유명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으로 빌립보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자신이 감옥에 있으면서 기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성도들이 지금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 복음이 오히려 더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 (빌 1:12~14)
바울은 옥중생활이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아니라 로마의 친위대 군인들에게 예수님이 전파되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살아서 석방되든, 감옥에서 순교하든 관계없이 오직 자기 몸을 통해 예수님만 높여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2) 빌립보 교회에 영지주의자들이 이단들이 들어와 교회를 혼잡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두 부류의 거짓 교사들이 등장합니다.
율법주의적 유대주의자들과,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믿어 초기 영지주의(Gnosticism)입니다.
이들을 사도 바울은 개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빌립보서 3:2~3)
예수님만 믿으면 안되다. 율법도 할례도 중요하다고 강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손할례당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적 조건이나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은 복음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립보서 3:18~19)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경고한 이들은 “영적인 지식(Gnosis)으로 구원받았으니, 악한 육체로 무슨 짓을 하든 영혼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며 방탕하게 살던 영지주의적 거짓 교사들입니다.
자기 정욕(배, 腹)을 신으로 섬기며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해서 뭐해 성령받으면 뭐해하면서 살아가는 교회안에서 성도들입니다.
성육신(Incarnation)과 십자가의 대속,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이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로 인하여 교회가 타락하고 예수님의 복음이 변질되어가는 것입니다.
3) 교회내에 유오디아와 순두게 (Syntyche)’입니다.
‘순두게’를 ‘순두부’처럼 친근하게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 내에 핵심 중직자들입니다. 여전도회장처럼 정말 열심히 봉사하던 신실한 여성 리더들이었습니다.
‘투기와 분쟁(갈등)’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4:2)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교인들의 실명을 직접 언급하며 “싸우지 말라”고 한 것은 교회내에 심각한 갈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두게와 유오디아는 분쟁과 거치레의 문제로 목숨을 걸고 싸워서 교회에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빌 4:3)
성격 차이로 인해 의견 대립이 생겼고, 이것이 점차 “내가 더 옳다”, “내가 더 열심히 한다”는 투기와 자존심 싸움입니다.
-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일에든지 부끄러움이 없는 신앙생활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1) 카보베르데의 간절함입니다.
우루과이(2-2), 사우디아라비아(0-0), 스페인과 비기게 되었습니다. 조별리그를 무패로 통과했습니다. 공을 하나라도 더 막아내겠다는 간절함, 국가를 대표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투혼이 있었기에 다윗이 골리앗들과 대등하게 싸우는 축구의 참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축구는 이름값이나 몸값으로만 이기는 스포츠가 아니며, 운동장을 적시는 선수들의 간절한 땀방울이 기적을 만듭니다.
2) 간절함이 있어야 자신의 소망이 이루워집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간절함이 있어야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종교적인 형식이나 ‘거치레’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상달되기 위해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참된 간절함이 무엇인지 3가지입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겟세마네의 간절함)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2) 담대함입니다.
도쿠가와 막부의 잔혹한 박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자들이 어쩔 수 없이 겉으로 ‘타협(배교)’을 선택해야 했던 아픈 역사가 바로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의 핵심 주제
엔도 슈사쿠는 이 책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폭발적인 성장 (16세기 말):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선교사에 의해 일본에 가톨릭이 처음 전파된 후, 영주(다이묘)들과 민중들 사이에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신자가 3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배교’를 목적으로 한 고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을 버리게(배교) 만드는 것이 기독교를 뿌리 뽑는 데 더 효과적임을 알았습니다. 이에 따라 거꾸로 매달아 피를 말리는 ‘구멍 매달기(아나쓰루시)’
페레이라 신부 (실존 인물): 포르투갈 예수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크리스토방 페레이라 신부는 실제 구멍 매달기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했습니다. 그는 일본식 이름을 얻고 불교로 개종하여 기독교 반박서를 쓰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로드리고 신부 (실제 인물 주세페 키아라 기반): 스승의 배교 소식을 믿지 못하고 일본에 밀항한 제자 로드리고 역시 결국 체포되어 배교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성도들과 신부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기 위해 가장 교묘하고 잔인한 심리적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후미에(성화 밟기)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발로 밟게 하여 신자를 구별해 냈습니다. “이 동판을 한 번만 밟으면(타협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막부는 신부(로드리고)에게 “네가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저기 구덩이에 갇혀 신음하는 무고한 일본인 신자들을 계속 고문해 죽이겠다”
III.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언제 부끄러워합니까?
- 죄가 들어나면 부끄러워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습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부끄러움입니다. 둘째로 두려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에 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다윗처럼 회개해야합니다. 사무엘하 12장에 우리의 아내 밧세바의 범한 죄를 은폐하지 않고 회개하였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왕의 체면을 버리고 왕좌에 내려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여러번의 잘못을 예수님께 지적받았지만 그는 끝까지 은 30냥을 위하여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자신의 수치심, 괴로움으로 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살하였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며 돈을 성소에 던져버렸습니다.
아간은 죄가 들어가기 전까지 여러분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여리성에서 패배, 그리고 자신의 지파에서, 가족으로 올 때까지도 숨겼습니다. (여호수아 7장)
아간은 탐욕에 눈이 멀어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와 은, 금덩이를 훔쳐 자기 장막 밑에 숨겼습니다.
-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직업을 코링이라고합니다. 라틴어로 ‘보카레(Vocare: 부르다)’‘보케이션 (Vocation: 천직·직업), 영어로 (Calling: 부르심·소명)’직업입니다.
“내 직업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삶의 자리” 그 자리가 목사, 가정부, 자영업, 청소부, 어떤 직업이든지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입니다. 어린 시절 다림방이라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사장님이 저를 주일성수 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공부하다 죽는 것은 순교이다: 학생의 소명은 공부입니다.
마틴 루터가 “구두 수선공이 거룩한 옷을 입을 필요 없이 좋은 구두를 만드는 것이 그의 예배”라고 했습니다.
“내 사업, 내 이익”만을 위해 악착같이 일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남의 일(고용주의 일, 회사의 일)’을 내 일처럼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합니다.
(전도서 9: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
로마서 12장 2절”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는 말씀의 원어적 의미가 바로 “세상의 패턴(틀)을 따라가지 말라” “세상의 성공, 돈, 권력, 안락함을 1번에 두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내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입니다.
찬송가 542장 ‘주여 지난밤 내 꿈에’가 있습니다. 3절의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라는 가사를 통해 세상의 흐름을 따르지 않겠다는
인천에서 우리 사모와 함께 들은 찬송가가 지금도 마음속에 여운으로 남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진정으로 감동이 되는 것은 성스러움과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무거운 짐 벗어버렸네
죄 중에 다시 방황할 일 전혀 없으니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후렴]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창세기 39장에서 보여주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매일 밤마다 눈짓으로 유혹하였습니다. 창세기 39장 7절입니다.
창세기 39장 7절에서 요셉에게 ‘눈짓’을 하며 유혹했고, 10절 말씀처럼 ‘날마다’ 끈질기게 다가왔습니다.
“주인이 당신 외에는 모든 것을 내게 맡겼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은밀한 공간에서 거룩함입니다.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① 단순성 (단순한 신앙생활)세상은 복잡한 핑계를 댑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아무도 안 보니까”라며 죄와 타협합니다.
② 홀로 있기 훈련 (독처의 훈련), 아무도 보지 않고 철저히 혼자 남겨졌을 때, 인간의 진짜 영성과 본습(죄성)이 드러납니다.
③ 복종 훈련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 앞에 살기)
490장 가사처럼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III. 온전히 담대히 그리스도가 존귀하는 것입니다.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마가복음 15장의 아리마대 요셉이 보여준 ‘담대함’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풍조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믿음의 태도입니다.
헬라어 ‘파르레시아(Parrhesia)’의 사전적 의미와 성경 속 인물들의 용기를 통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참된 믿음의 정체를 정리해 드립니다.
- 파르레시아(Παῤῥησία)의 뜻: 주눅 들지 않는 ‘담대함’사전적 정의: 헬라어 ‘파르레시아’는 ‘모든 것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말하다’, ‘확신에 찬 담대함’을 뜻합니다.
권력자나 두려운 환경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거나 주눅 들지 않고, 진리를 당당하게 선포하는 영적 용기입니다.
예수님의 파르레시아,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빌라도 총독 앞에서도,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비굴하거나 주눅 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당당히 말씀하셨고, 동시에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온전한 순종을 이루셨습니다.
윤동주는 자신의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야 하는데 그 길이 1)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이고, 2) 사람을 굽어봐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 두 번째 기쁨이다 3) 천하의 영재들을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기쁨이다
담대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담대하게 자신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갔습니다. 에스더는 담대한 여성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면서 담대히 왕의 부르심을 받지 않고 왕앞에 나갔습니다. 하만 앞에서 모르드게는 담대하였습니다. 그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담대함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도 담대한 사람입니다. 복음 증거할 때에 그는 수 많은 고통과 핍박이 있어도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마음이 약해서 주저주저하는 사람, 할까 말까 갈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말세에는 사람들이 몇 십배 몇 백배 환난과 핍박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 때에 두려워서 떨고 용기있게 앞으로 나가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패배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몸은 병원균이 없어서 건강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원균이 있어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저항력이 있으면 감기도 이기고 암도 이기는 것입니다.
영국의 평론가이자 역사학자인 칼라일(Thomas Carlyle ; 1795∼1881)은 “어떠한 위험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백성에게는 두려움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평강이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웠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지 않는 사람들이 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아프다고 학교가지 않습니다. 아프다고 직장가지 않습니까? 아프다고 학교 가지 않습니까? 직장도 학교도 모두 갑니다. 이를 악물고 돈 벌러갑니다. 그런데 아프면 교회가지 않고, 마음이 아프면 주일출석하지 않고, 물질이 없으면 교회나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대와 소망은 잘 먹고, 잘 살고, 명품 옷 입고 사는 것이 사도 바울의 기대와 소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비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비움에서 체워짐으로 나가는데 이 체워짐이 바로 기대와 소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