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3장 14절 예배가 회복됨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2026년

 

사무엘하 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사무엘하 6: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역대상 13: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1. 序論

하나님을 믿습니까? 아멘입니다.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선하심을 얼마나 경험하셨습니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시편 34장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그 은혜를 맛본 사람에게 믿음은 더 이상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아내를 알았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사모도 저를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50%만 알면 결혼할 수 있습니다. 알아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레미야 9: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 하나님의 언약궤

사무엘하 6장에 기록에 의하면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로 모셨습니다.

 

사무엘하 6장 3절~4절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절: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사무엘하 6:3과 역대상 13:7에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6:4는 “아효(아요)는 궤 앞에서 가고”라는 말은 앞에서 끌고, 웃사는 옆이나 뒤에서 수레를 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6:6-7)

 

평탄하게 가던 새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자 갑자기 소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본능적으로 뒤에서 따르던 웃사는 궤가 땅에 떨어져 훼손되는 것을 막으려고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궤를 붙잡았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궤를 보호하려는 선한 행동처럼 보였으나, 율법(민수기 4:15)에 따르면 성물은 반드시 제사장이 어깨에 메어야 하며 결코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인간의 부주의나 임의적인 방식(수레)으로 취급받는 것에 대한 엄중한 심판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잡아야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의 종이 생각해야할 것은 수레가 아니라 매고 가는 것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역대상 13:10-11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11절: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다윗이 노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베레스웃사(Perez Uzzah): ‘베레스’는 ‘부수다’, ‘터뜨리다’, ‘찢다’라는 뜻이고 ‘웃사’는 인명입니다. 즉, “웃사를 찢으셨다”는 뜻으로 그 장소의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성이 함께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 거룩함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이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임재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숨을 거두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휘장이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우리는 웃사처럼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히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 덕분에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출애굽기 25장 12절로 15절까지 보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언약궤를 이동식으로 설계하셨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게 채를 사용하셨습니다.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낀 대로 두어 빼내지 말지며”

 

운반할 때에 제사장 특별히 레위 자손의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민수기 7장 9절)입니다. 수레를 사용해도 되는 성물이 대부분이지만 오직 언약궤는 반드시 어깨에 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웃사 사건 이후 다윗의 깨달음 (역대상 15:15) 실패를 맛본 다윗이 비로소 하나님의 법대로 궤를 옮기며 기뻐하는 장면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찍(채)으로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어깨에 멘다는 것은 주님과 동행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내 몸에 느끼게 함으로 내 발걸음과 인격적인 연합입니다. 내 삶과 주님과 동행함입니다.

사무엘상 2장에 엘리의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에 그들은 불량자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주의 종의 가정에 태어났는데 불량자가 될 수 있습니까?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을까요? 진정으로 체험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제물을 갈고리로 찍어 가로채는 죄입니다.(사무엘상 2:13-17) 제물을 삶을 때 사환을 보내 세 살 갈고리를 솥에 넣어 걸려 나오는 것을 마음대로 가져갔습니다. 하나님께 기름을 태워 드리기도 전에 날것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며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둘째로 성적인 타락입니다.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등 지도자로서 입에 담지 못할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들이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신상인 다곤 신상 앞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첫번째로 다곤 신상이 엎드러지게 하였습니다. (3절”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이튿날 다시 다곤 신상에 두었는데 목과 손목이 부러졌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하나님이 진짜 신이고, 다곤은 가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세워져야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연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재앙인가? 그 방법으로 어미 소 두마리를 멍에 메어보지 않는 소, 특별히 젖 나는 새끼가 있는 어미소를 택하여 본능적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멍에를 메어보지 않는 소를 택하여 이스라엘 영토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갈 때에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좌우로 치우치면 우리를 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6장 9절)

 

사무엘상 6:12에 암소가 벧세메스로 갈 때에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어미소는 모성으로 인하여 울면서 갔지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벧세메스로 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궤가 돌아오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손자의 출생 때에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남을 의미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렇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주의 종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종교적인 기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일마다 예배드리러 오시는 성도님들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야지 죽은 예배를 드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시간에 기쁨으로 먼길에서 오십니까? 몇 시간씩 걸려서 오십니까? 설레는 마음으로 예배당에 오십니까? 어떤 성도는 아내에게 끌려서 오시는 성도님이 계십니다. 어떤 성도들은 예배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 것 같아서 억지로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예배 시간에 가능하다면 핸드폰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한국교회가 고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점쟁이 예배입니다. 복 받기 위하여 나오는 예배입니다. 아닙니다.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입으로 찬송을 부르고 있지만 마음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도 이러한 예배를 싫어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마당만 밟는 예배 (이사야 1:12-13)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20년 이상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데 아직도 하나님께 예배드림에 감격이 없고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이 없으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보기 위하여 예배로 생각한다면,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면 예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작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의 예배입니다. 아직도 껍데기 예배이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 껍데기 예배는 마치 암덩어리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시간에 돈 버는 생각을 하면 지금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통하여 돈을 벌고 있다면 그것에 귀는 솔깃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몸과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것입니다. 종교 껍데기 신앙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브리서 10:31) “하나님은 시퍼렇게 살아계신다”는 것을 느껴져야 합니다. 관념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중심을 살펴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실재(Reality)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포입니다.

 

 

저명한 신학자 R.C.Sproul(알씨 스프롤) 박사가 웃사의 사건을 해석했습니다. 스프롤 박사는 사람들이 웃사의 죽음을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인간의 교만”입니다.

 

“내 손이 땅보다 깨끗하다”는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진흙탕(흙, 땅)에 떨어지면 더러워질까봐 손을 뻗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 웃사는 자신의 손이 땅보다 더 깨끗하다고 생각했을까?”

 

땅 흙은 하나님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지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땅은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더러운 손입니다. 궤가 순수한 땅에 떨어지는 것은 큰 모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인간이 붙잡아줘야만 유지되는 연약한 법궤가 아닙니다. 다곤 신상 앞에서도 그의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예배는 암덩어리를 달고 다니는 우리의 몸과 같은 것입니다.

  1. 오벧에돔의 가정으로

 

하나님은 베레스 웃사의 가정에서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나오는 것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교회를 나오는 것이라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백악관 부활절 행사(Easter Egg Roll)에서 어린이들 옆에 서서 “이란보다 더 적대적인 상대는 없다”고 발언한 것은, 평화와 용서를 상징하는 부활절의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종교의 도구화해서는 안 됩니다. 미 정부 당국자들은 이란 내 미 공군 조종사 구조를 “부활절의 기적”이라 부르며 전쟁의 정당성을 종교적 언어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가면 여러분들은 어디에 모시기를 원하십니까? 옆자리입니다. 동행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로 말씀하면 법궤를 운전자의 옆자리가 아니라 트렁크에 싣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내가 운전하는데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에 사고 날 때에 보험이 필요할 때에 그 때에 꺼내서 사용하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언약궤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이고 임재의 장소입니다. 성원순복음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느끼고 체험해야 합니다. 예배는 트렁크에 계시는 분을 내 앞자리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운전하고 그분이 가라는 대로 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역대상 15:2: “다윗이 이르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사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영원히 그를 섬기게 하셨음이라 하고”

 

“전에는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13절)

역대상 15: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우리는 규례대로 그에게 행하자는 말씀입니다. 전에는 그렇게 예배드리지 않았지만 지금 하나님의 방법대로 예배드리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주일날 새벽에 우리 성도들과 다시 한번 주일날 주시는 말씀을 증거합니다.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주일날 나간 성도들을 언제부터 기다리고 계시는가를 생각하여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성전을 나가는 순간부터 주님은 여러분의 자리에 앉아계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둘째로는 우리 성도들 대부분이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지만 다른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합니다. 그래서 주일설교를 새벽기도회 시간에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6: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미갈이 이층에서 다윗의 춤추는 것을 보고 업신여겼다고 하였습니다. 한국말은 다 듣고 의미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잘하고 있네라는 표현은 정말 잘하고 있다는 표현입니까? 아니면 잘못하고 있다는 표현입니까?

 

잘 먹고 잘 살아라의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체통도 없이 손을 들고 찬양해, 통성으로 방언으로 기도해 하나님이 귀가 없으시냐하고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습니까?

 

미갈이 다윗에게 “방탕한 자가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체통 없이 행동했다”고 비꼬자,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무엘하 6: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신학자 엘렌 데이비스(Ellen Davis)가 강조한 시편의 통찰과 ‘탄식시(Lament)’의 영성을 기가 막히게 꿰뚫어 보고 계시네요!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느라 속 시원한 기도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렌 데이비스는 시편의 대부분이 감사나 찬양이 아니라 ‘탄식’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대부분의 시편은 탄식과 절규 (Lament)시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항변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대체 어디 계십니까? 왜 나를 고쳐주시지 않습니까? (시편 13편, 22편 등)

 

윤리도 없고 형식도 없는 기도입니다. “원수의 이빨을 부러뜨려 주소서”, “저들의 자녀들이 복수 당하게 하소서” 비윤리적인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시편은 무례한 기도입니다.

 

엘렌 데이비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최고의 친밀함이라고 말합니다.

신학자는 가면을 벗는 기도입니다. 예의를 차리지 않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분이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계시는 분입니다.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죽겠습니다!”로 시작하지만, 속을 다 쏟아내고 나면 결국 “그럼에도 주님을 신뢰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끝납니다. 속 시원한 기도입니다. 현대인들은 속 시원한 기도를 하지 못하고 마당만 밟고 가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갈처럼 체통을 지키느라 마음으로 찬양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의를 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쏟아놓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시편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편 109:9-10: (원수를 향한 탄식) “그의 자녀들은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달팽이가 태양 아래서 죽어가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지렁이가 태양 아래서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편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는 모든 언론의 자유가 허락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기도는 우리의 섭섭함을 표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섭섭함의 기도가 오지 않을까요? 내일 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도 사람도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솔직하셔야 합니다. 죄가 있는데 없는 척 기도하는 가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진솔한 기도를 듣기를 원합니다.

 

영성은 감사와 섭섭함의 사이를 채우는 것이 영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감사와 섭섭함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휘포모네(Hupomonē)’라는 헬라어 단어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아래(hupo)’에 ‘머물다(monē)’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즉, 환난과 섭섭함의 무게가 나를 짓누를 때,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견디며 딛고 일어서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웃사가 죽었을 때 다윗이 느꼈던 ‘두려움과 분노’, 하박국이 무화과 열매가 없을 때 느꼈던 ‘막막함’이 바로 우리의 섭섭함입니다. 하나님께 기대했는데 상황이 나빠질 때 우리는 섭섭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내하는 것이 우리의 영성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1. 춤을 추다

사무엘하 6: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여러분 30년을 살아온 집사님에게 묻겠습니다? 아내가 무섭습니까? 아니면 귀엽고 사랑스럽습니까?

 

아내가 정말 무서운 것은 화를 낼 때에 무섭습니까? 말하지 않을 때에 무섭습니까?

 

말없이 춤을 춘다는 것은 춤 속에서는 하나님의 찬양의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몸짓입니다.

 

춤을 추는 것은 채통과 상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잘 보아라 이렇게 춤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찬양이다라고 알리는 것입니다. 나는 왕이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왕은 이재명 대통령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왕은 트럼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왕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춤입니다.

 

이제까지 내 삶 속에서 왕 노릇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돈이고, 명예고, 건강이라면 이제는 나의 왕을 바꿀 차례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고 나의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바다와 땅을 밟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0장 2절: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5절: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모든 세계가 그의 발 아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이나 나라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찬양을 해야합니다.

 

시편 24:7-10 (영광의 왕) 7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절: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절: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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