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장 경계를 허무시는 예수님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2025년 10월 12일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거절하지 못하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 – 김현 (바운더리) 뇌 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김현 교수님이 쓰신 책입니다. “나는 지금 나 스스로 경계선 밖에 서 있는 건 아닌가?”라고 질문하며, 자신을 지키는 ‘경계’, 즉 ‘바운더리’를 세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리지 않고 사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에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여러분들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있습니다. 운전대는 내가 쥐고 있는데 주변에서 전주로 가자, 대구로 가자, 광주로 가자, 부산으로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강릉으로 가고 싶습니다. 경계선, 즉 바운더리는 중요한 것을 담고 있는 공간입니다. 나의 내면을 강하게 하는 것, 나의 신념, 가치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전라북도 김제에서 외할머니 댁에서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술래잡기하고 놀 때에 외할머니가 부르시면 우리 동생 홍정기와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들어가기 전에 대청마루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옷을 다 벗고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몸을 씻고 잠을 잡니다. 제 동생 정기는 꼭 밤에 일어나 똥을 쌉니다. 무서워서 할머니와 함께 뒷간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와서 잠을 자는데 잠을 자지 않고 고구마를 또 먹고 잡니다. 집과 마당의 경계선 즉 대청마루가 경계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경계선이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경계선은 성전입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의 경계선은 이스라엘 나라였습니다. 이러한 보이는 경계선도 있지만 그들 스스로 정하는 율례와 규칙을 통하여 경계선을 그었습니다. 부정한 것과 부정하지 않는 것들의 경계선, 거룩한 것과 부정한 사람들의 경계선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거룩한 민족이라고 하여 선민이라고 하여 경계선을 긋고 이방인들 다른 나라 민족과 구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한 날이라고 하여 다른 날들과 구분하여 경계선을 그었습니다. 음식도 경계선이 있습니다. 엄격한 규례의 코셔가 있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부정한 음식,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돼지고기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할례라는 제도를 만들어 이방인들과 구분하고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외부와 경계선으로 구분하였습니다.

 

특별히 같은 민족이긴 하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구분하였습니다. 같은 12지파였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 민족에게 혼합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구분하고 경계선을 그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역개정 요한복음 4장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서로간의 경계선이 있습니다. 순복음은 성령과 능력, 기도를 강조하고,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고, 성결교회는 성결한 삶, 경건한 삶을 강조하면서 구분을 짓습니다.

 

우리 성원순복음교회에도 오래전부터 다녔던 분들과 지금 다니고 있는 분들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이러한 구분들이 있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계선을 허물어야 합니다.

 

 

  1. 유대인의 경계를 허무시는 예수님

 

민족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5)

유대민족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특별한 민족으로 그리고 6절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출 19:6)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을 연결하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경계선을 긋고 자신들만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또 거룩하게 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6) 그러나 거룩한 백성으로 살지 못하고 음란하고 우상숭배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버리시고 멸망하게 하셨습니다.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가 예수님이 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온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새로운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을 위하여, 그리고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방민족을 구원하고자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민족은 타 민족과 경계를 허물지 않고 오직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함으로 전쟁하게 됩니다. 타 민족과 함께 살아가지 못합니다. 해외에서도 자신들만 집단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기 위하여 이러한 경계선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새롭게 오신 새가족이 있다면 따뜻하게 맞아주어야 합니다. 김승우 님이 우리 교회에 온 지 몇 주 되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음식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먹지 말아야 할 것과 먹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카슈루트(Kashrut)’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 토끼고기, 말고기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되새김질하지 않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는 동물들은 부정하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산물 중에서도 새우, 조개류, 갑각류와 메기, 장어, 오징어 등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햄버거 중에서도 치즈 버거를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에 새끼를 어미 염소 젖에 삶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안식일(샤밧)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가장 중요한 날이기 때문에 ‘멜라카'(מְלָאכָה, melachah)라고 불리는 ‘일’ 또는 ‘노동’으로 간주되는 행위는 철저히 금지된답니다. 원치 않는 것을 손으로 골라내는 행위, 상한 과일이나 음식을 골라내는 행위, 더러운 그릇을 골라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우거나 불을 끄는 행위를 금지합니다. 전기를 켜고 끄는 행위도 이에 포함됩니다. 냉장고 문을 열 때 램프가 켜지는 것도 금지되는 행위입니다. 안식일에 비가 와도 우산을 펴는 것을 금지합니다. 알파벳 두 자 이상 쓰는 행위가 금지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체 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기 때문에 예배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고 비벼서 먹는 행위를 하셨어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큰 논란을 삼았습니다.

 

손마른 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9절 이하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행위를 치료라는 노동 행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을 옳으냐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경계를 허물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 금요일에 십자가 죽으시고 안식일에는 아무 일을 하지 않고 무덤에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아닌 주일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날이 된 것입니다.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날 부활하셨습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새로운 언약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날 복을 주셨지만 예수님은 구약의 경계를 허물고 예수님은 새로운 날 주님의 날에 부활하여 새로운 창조의 시작으로 새로운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주일날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날의 시작 주일날 부활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가복음 2:27-28)

 

유대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율법에 갇혀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율법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새로운 언약의 정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계를 허문 예수님을 그대로 두지 않고 죽였던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때에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 했습니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켐핀스키호텔에서 수백 명의 임원들을 모아놓고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불리는 신경영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제품의 품질은 낮고 생산량만 늘리는 ‘양 위주 경영’에 도전을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 성원순복음교회도 복음, 하나님의 말씀 외에 모든 것을 바꾸어도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근원이 되는 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의 90%, 누가복음에서는 약 65% 정도 인용되거나 편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근원과 같은 복음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독일어로 Q Quelle (출처, 원천)이라는 말을 가지고 있어서 마가복음 외에 두 복음서만이 공유하는 예수님의 말씀 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III. 본문

 

복음의 시작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구약의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된 소식 good news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복음을 허물고 새로운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유대인의 경계를 허물고 계십니다.

 

첫 번째로 22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부르지 않고 세리 출신과 천민 출신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당시에 존경받는 지도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부르지 않고, 세리, 어부, 독립운동가를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경계인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죄인들 세리와 창녀를 통하여 구원과 하나님의 사역의 동역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

 

둘째로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22-28절 회당과 같은 거룩한 장소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셋째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29절-31절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갔고 수종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병자를 접촉하는 것은 정결함을 해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병 환자의 치료입니다. 40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나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부정한 병을 손대는 것은 구약의 성경에 부정한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전염을 막기 위하여 나병 환자들은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면서 다녀야 하고, 이에 대하여 접촉함으로 나병을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깨끗함은 그들에게 병 치료 이상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치료함으로 인하여 자신들도 사회의 일원이 되어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것은 치료를 받고 예배할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록도에 가면 나병 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많은 은혜가 된다고 합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의 헌신적인 봉사처럼 사랑과 희생으로 아픔을 치유해 온 곳이기에 ‘마음의 섬’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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