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1장 12절 새벽기도회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 목사 2025년 9월 30일
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우리 몸을 ‘장막(tent)’ 또는 ‘성막(tabernacle)’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말 심오하고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1) 일시적인 거처 (Temporary Dwelling) 장막 텐트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임시적인 숙소입니다. 이동하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서 세운 텐트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우리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을 놀러 갔습니다. 천왕봉까지 올라가는 길에서 잠시 머물고 잠을 자는 장소입니다. 천왕봉에 올라갔다가 다시 집으로 가는 동안만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 (고린도후서 5:1). 베드로 사도도 자신의 죽음을 “나의 장막을 벗을 것”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13-14). 우리의 몸은 영원한 영혼이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임시 거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원한 장막이 있습니다. (Hope for Eternal Home) 성경은 더 나은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고린도후서 5: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부활,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장막을 벗으면 영원한 몸을 얻게 되는데 부활의 몸이요 영광스러운 몸입니다.(고린도후서 5:2-4).
2) 전유성 연예인의 죽음을 통하여 얻는 은혜 연명치료 거부하였습니다. 생전의 폐기흉 증세가 악화되어 연명치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장례 절차는 간소하게 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이건 하지 마라”와 같은 말을 자주 했지만, 이것이 정식적인 유언은 아니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죽기 전에 최양락을 부른 이유는 “내가 곧 죽을 것 같다. 그런데 네가 보고 싶다.” 당시 일본에 있던 최양락 선생님은 그 전화를 받고 촬영이 끝나자마자 급히 귀국해서 전유성 선생님이 계신 병원으로 달려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영혼의 후배’라고 부를 정도로 매우 아꼈습니다.
조세호를 키웠다고 합니다. 전유성은 예원예술대학교 코미디연기학과 학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사제 관계를 맺었고 조세호는 전유성 선생님과의 만남이 “교수님의 후배일 수 있어서, 제자일 수 있어서 너무너무 행복했고 감사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결혼식 주례를 통한 인생의 멘토링: 지난해(2024년) 10월 20일에 주례하였습니다. 주례사에서도 “한 층 정도는 ‘조세호 극장’을 만들어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는 곳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덕담.
- 본문에서 생각한다 (12절, 13절, 15절)
본문에서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예수님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함으로 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곳의 반석은 네 믿음의 고백 위에 신앙 간증 위에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천주교에서는 베드로, 즉 베드로 위에 세운다고 하여 베드로 성당을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
그러나 베드로의 반응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태복음 16:22).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 인류의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준엄한 책망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태복음 16:23)
베드로는 또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괴로운 심정으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기도에 동참하지 않고 잠이 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베드로를 꾸짖으셨죠 (마가복음 14:38, 마태복음 26:41).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 앞에서 베드로는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는 충동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음 26:52, 누가복음 22:50-51).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예수님 체포 후)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도 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부인합니다 (마가복음 14:66-68). 베드로가 바깥뜰에 나왔을 때 다른 여종이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하자, 베드로는 맹세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합니다 (마가복음 14:69-70). 잠시 후 곁에 섰던 사람들이 “너는 진실로 그 패거리 중 하나이니 네 말씨로 너를 안다”고 하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합니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마가복음 14:71-72).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만나서 세 차례 질문을 합니다. (요한복음 21:15-17)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교묘히 만든 이야기(cleverly devised tales/myths)
인간의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하나님이 섭리하신 이야기입니다. 인간, 즉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단은 한 시대에 유행하지만 예수님이 오고 오는 세대에 영원토록 변함없는 말씀입니다.
교묘한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Fictional/Man-made Stories)
꾸며내며 황당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대의 유행을 쫓아서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상과 영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 (Deceptive Teachings of False Teachers)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교묘한 이야기와 대비되는 것이 바로 친히 본 증거입니다 (Eyewitness Testimony). 이것은 예수님이 침례 장면에서 보았고, 많은 이사와 이적 가운데 보았고, 특별히,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지칭합니다 (마태복음 17:1-8).
베드로는 야고보,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시는 것을 직접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신 예수님의 모습과 하늘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베드로 시대의 이단은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를 업신여기는 영적인 지혜를 주장합니다. 초기 영지주의(Gnosticism). 그노시스는 ‘앎’, ‘인식’, ‘지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적인 지식(intellectual knowledge)이라기보다는 깊은 영적인 깨달음이나 통찰, 비밀스러운 지식을 의미하는 경우입니다. ‘영지(靈知)’라고 번역됩니다. 영(spirit)은 선하고, 물질(matter)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집니다. 비밀스럽고 영적인 ‘앎(그노시스)’.
예수님의 성육신(몸을 입고 오심)과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고,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보다는 특별한 지식에 초점을 맞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8-9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