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2장 14절 금요철야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 목사 2025년
디모데후서 2장 14절: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다투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아무 유익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절: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절: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이 가장 늦게 작성한 서신은 바로 디모데전후서입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뒤를 이을 복음 전도자인 디모데에게 유언과 같은 말씀을 증언합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사도바울의 감옥생활
- 사도행전 16장 빌립보 감옥: 매 맞고, 차꼬에 채이며, 열악한 환경의 감옥
2. 사도행전 23장의 가이사랴 감옥: 헤롯 궁에 갇힌, 면회 가능한 감옥입니다. 약 2년 정도 감금되었으며, 총독과 왕 앞에서 변론하였습니다.
3. 사도행전 28장의 감옥: 가택 연금, 병사와 연결된 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감옥입니다. 약 2년 정도 있었습니다. 옥중서신(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을 기록했으며, 재판을 기다리며 풀려났습니다.
4. 디모데후서 2-4장의 로마 감옥: 고립되고, 혹독하며, 암울한, 짧지만 처참한 감옥, 순교 직전의 감옥입니다. 중죄인들과 함께 있는 감옥입니다.
1.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살아라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고전 1:18, 23).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은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전에 계획하신 일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상상할 수 없고, 인간의 방법으로 만들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분의 능력, 곧 십자가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음을 알고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함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의(義)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함으로 복음에 빚진 자로 살아가 이제 순교하려는 장면에서 그의 제자에게 유언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옛날에 제가 전라북도 김제군 황산면 진흥리 상목 김판철 할아버지 댁에 살 때, 상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향에 올 때 자랑스럽게 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동생은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안에서 큰 부를 얻어 벤츠를 타고 나타나니까 모든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제 동생 이름과 같은 최정기가 고향에 나타날 때에는 그 집 식구들이 부끄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17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 디모데후서 1장 15절: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난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바울은 복음 때문에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특히 마지막 투옥은 순교가 임박한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동역자들의 지지와 위로는 매우 절실했을 것입니다.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고 분명히 명시합니다. 이는 바울이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혹은 복음을 전하다가 큰 위험에 처했을 때, 바울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버린 행위를 말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들이 배반자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오는 배신감과 외로움이라는 정신적인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이방인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 등을 언급하며 사람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크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16-18절에서 오네시보로라는 인물을 언급하며 부겔로와 허모게네와는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갇혔을 때, 심지어 목숨을 무릅쓰고 바울을 찾아와 시원하게 해주며 격려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 나처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난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할 때 당하는 고난을 기꺼이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2장 3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고난을 받으라.”
왜 이렇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5절에서 디모데의 믿음을 **”네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ανυποκριτος πιστις, anypokritos pistis)”**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이는 그의 믿음이 외식적이거나 가짜가 아닌, 진실하고 순수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1장 8절과 2장 3절에서 강력하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고난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복음을 증거하다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산 소망 때문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고난이 따르는 것은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복음을 방해합니다. 시대적으로, 종교적으로, 삶의 영역에서, 질병으로, 가족 관계를 통하여 끊임없는 고난의 연속입니다.
디모데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소유했다고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의 불 속에서 정금같이 연단되어 흔들림이 없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빌 3:10).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진정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 믿음이 복음의 본질적인 속성인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더욱 견고한 사역자로 서며, 복음이 더 크게 확산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3. 고난을 사랑으로 이겨라
디모데후서 1장 6절: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따르면,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못에 던지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불못에 던지우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들을 의미하며, 제일 먼저가 바로 “두려워하는 자들”이 포함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말씀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복음도 사랑합니다. 사도 바울이 당하는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사랑의 흔적입니다.
복음과 고난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부와 명예로 여기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과 고난을 하나로 여기면서 십자가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복음과 고난을 함께 보았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 ~ 1945년 4월 9일)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1930년에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유학 중이었습니다. 1939년, 이미 나치 정권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 본회퍼는 안전하게 미국에 머물라는 권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민족과 동역자들이 고통받는 독일로 돌아갈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난의 때에 자국민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독일이 망한 후 기독교의 재건에 참여할 자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히틀러의 폭정과 전체주의에 반대한 **고백 교회(Bekennende Kirche)**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저항하여 “작전 7″이라는 유대인 구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나치 정권은 그의 행동이 “국민을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발언 금지 조치를 내리고 그의 움직임을 감시했지만, 본회퍼는 옳다고 여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반(反)나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죄로 1943년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4월 9일, 39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