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첫째로, 메메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Memento Mori
고대 개선장군들이 개선행진을 하면서 전차 뒤 탑승한 사람이 개선 장군에게 계속적으로 외치는 말입니다. 오늘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승리에 취하여 살면서 우리는 그 승리에 취하여 살다보면 그 승리를 교만하여지고 타락해지는 것입니다.
요즘 하나님의 은혜로 평강이도 완전히 졸업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이렇게 감사함으로 누려도 되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우리 사모가 겨울 방학이 끝나면 내년에는 겨울에 학교를 가지 않고 8월이면 정년 퇴직하면 됩니다.
그동안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기억하고 감사해야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은택을 잊지 말라. 시편 103편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둘째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에 충실하라(세월을 아끼라)
에베서서 5장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메뚜기가 하루살이야 내일 또 만나자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단어를 모릅니다. 하루만 살다가기 때문입니다. 개구리가 메뚜기야 우리 내년에 또 만나자 그러자 메뚜기가 물었습니다. 내년이 뭐니? 한해를 사는 메뚜기에는 내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믿는 성도들이 장례식장에서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그곳에서라고 부르면, 오늘만 살고 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만 살고 가는 사람들은 천국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우리 알고 있는 경험이 전부라고 믿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세상이 넓고 우리의 우주는 더 넓고 광대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욥기 5:9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마치 시므이 처럼 그렇게 행동합니다. 맨발로 예루살렘 궁을 떠나는 다윗왕을 보면서 시므이는 쫓아가면서 다윗을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네가 흘린 피가 하나님게 돌아가도다.” 군대장관 아비새가 왕이여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하소서 보통사람이면 허락하였을 것입니다.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 시므이가 다윗의 회복을 알았으면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셋째로,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사용한 단어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배가 돗으로 항해하듯이 거센 바람을 이용하여 그 목적지까지 빨리가는 것입니다.
찬송가 503장 고요한 바다로 If, on a Quiet Sea —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3. 내 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합소서. 4.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하늘의 연처럼 바람에 맞서라 자신의 손으로 만든 연을 한강공원에서 날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높이 아주 높이 올라가는 연의 모습 속에서 강한 바람에 맞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연을 올리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바람을 이용하여 연을 올립니다. 당겼다가 풀었다가 반복하여 연을 높이 높이 올리는 것입니다.
니체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다른 면이 있지만 그의 생각하는 면들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우리는 그의 생각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수용성이 있습니다. 니체는 운명을 필연적으로 순종하면서 살라고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개척하고 도전함으로 창조적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연과 같이 거센 바람을 이용하여 내 편에서 역경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본문의 시대적인 배경
AD64년 로마의 대화제로 인하여 민심이 폭팔하게 되었습니다.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전파되었습니다. 사흘만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도둑들은 황제의 명령을 사칭하여 방화설을 제기하였습니다. 현대 학계에서는 네로의 방화는 근거없다고 간주되었습니다. 그러한 소문을 들은 네로는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기를 원했습니다.
로마 시내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였습니다. 화재는 9일간 이루워졌고, 4개구역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그곳에서는 아무런 화재에 대한 피해가 없었다고합니다.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인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표현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로는 “그리스도인은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 의해 찢기우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혹은 화형이 되어, 해가 진 후 밤을 밝히는 일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타기투스의 연대기 중에서)
네로의 박해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죽음에 직면하고 있음을 느끼게되었고, 그리고 이 죽음 직전에 자신이 아들같이 여기는 디모데에게 목회서신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전제는 유대인들이 희생제물을 드릴 때에 포도주의 전제로 드림을 가리킵니다. 이방인들도 포도주를 불타고 있는 제물 위에 흔히 부었습니다.
본절의 의미는 사도 바울의 피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그의 생명의 피가 부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와 성도들이 자신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기 보다는 승리의 마지막 장식으로 드려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김환란박사)
제물 위에 붓는 포도주, 전제(drink offering), 여호와께 향기로운 향기라는 잘 알려진 평화의 형상 아래 자신의 생명의 피가 흘렀다고 말합니다(민수기 15:1-10) (요한복음 12:24). 사도바울은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 단어의 출발과 같은 것입니다. 천국으로 항해하는데 배의 케이블을 풀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음료를 다 마시지 못하고 남겨두었다면 마지막 음료의 콜라를 다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애의 마지막 부분을 주님께 부워드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낭비가 아니라 막달라마리야가 옥합을 부워드림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 35장 14.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출애굽기 29장에는 제사장들이 번제의 어린양과 함께 포도주 한 힌의 “ 전제”를 드림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전제(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어지고 나의 떠날 기약이 이르렀음이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사도바울의 삶 (전도를 후회없이 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증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울이 이를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발을 고처줍니다. 이로인하여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당황하여 비시디아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와서 바울을 돌로 칩니다. 사람들이 죽은 줄고 성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죽었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살아납니다. 다시 루스드라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합니다.
누가는 본문을 기록할 때 ‘아나스타스’라는 말을 사용하여, 바울이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셔서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의 ‘아나스타스’는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할 때 사용했던 단어 사도행전 14: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예화,
수십만 명을 주께로 인도한 19세기 미국의 대 부흥 전도자 무디가 하루한 사람에게 꼭 전도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런데 하루는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못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자책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는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다. 밤중에 거리에 나가 전도대상을 찾는데 한 술주정뱅이를 만났다. 그는 다짜고짜로 “예수님을 아시나요?”라고 했다. 그 술주정뱅이는 화를 벌컥 내는 것이었다. 무디는 쫓겨오다시피 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 3개월이 지나 문을 노크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그 술주정뱅이였다. 그는 고백하기를 그날 밤 “예수님을 아시나요?” 하는 말을 듣고 화를 냈으나 그 후 그 말이 내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지 못한 근심이 한 심령을 회개하고 구원시켰던 것이다.
후회없는 인생을 위하여 선한 싸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설교의 예화를 전쟁에 나가는 군인에 비유하고,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운동선수에 비유하곤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선한 싸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서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살았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의 욕망, 음욕, 물욕들과의 싸움입니다. 선한싸움은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전도의 싸움입니다. 그는 사도행전 20장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자신은 성도들을 위하여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주님께서 부탁한 말씀을 든든히 세우기를 위하여 노력하였고,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노력했으면 약한 사람들을 돕고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여 주는 생활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