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24장 1절, 마태복음 20장 1절 숫자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2026년 9월 4일
- 서론
사람들은 숫자를 세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고대 이집트에서 기원전 3300년 이전부터 10진법에 기반한 상형문제가 존재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는 약 2000년 경부터 점토판에 60진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숫자는 인도에서 아라비아 숫자의 완성으로 0에서부터 9까지 숫자체계가 완성되었습니다.
숫자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의 상징이고, 숫자는 재산과 권력의 상징입니다. 오늘날 단순한 양의 의미를 넘어서 인류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가치를 증명합니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컴퓨터의 기본 요소가 되었습니다.
돈의 숫자에 세계가 민감합니다. 미국의 달러 스왑(Dollar Swap, 통화스왑)’은 경제를 쥐락펴락합니다. 말 한마디로 주가와 비트코인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주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그 수장인 연준 의장입니다.
단순히 세상만 그러합니까? 교회도 그러합니다. 성도수에 따라서 목회자와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저는 매일 숫자를 세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예배인원 20명, 25명, 27명을 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로 동기 목사님들과 전화상 통화에서 교만하게 자랑했다가 다음 주일날에는 셀 성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숫자를 세지 않았습니다. 숫자보다는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성도님들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함이 더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구약시대의 숫자 세기
사무엘하 24장 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 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다윗은 인구조사의 숫자를 세다가 하나님께 7만명이나 되는 엉청난 백성이 죽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로 죽은 숫자는 정부(질병관리청)가 2023년 8월 말까지 누적 사망자 수: 35,934명입니다. 3만 5천명이 죽었습니다. 삼년동안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온 세계가 코로나로 인하여 마스크 쓰고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었는데 죽은 인원은 3만 5천명 가량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잠깐 사이에 7만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7만명을 죽였을까? 다윗의 잘못일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1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게는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압살롬의 반역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에 동조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세바의 반역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가볍게 여기고 끊임없는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윗의 잘못을 시발로 인하여 7만명이 죽게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다윗만 잘못했으면 되니까? 다윗만 혼내시면 되는데 왜 백성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백성들, 그리고 사탄의 세력 때문입니다.
역대상 21장 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2.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니
- 신약에서 숫자의 계수
개역개정 마태복음 20장
-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새벽기도시간에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는대 요한계시록 19장에 어린양 혼인잔치를 하게됩니다. 그때에 세마포옷을 입는데 그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고, 그 세마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는다고 하였습니다. 혼잔치에 다 들어올수 있는데 예복을 입지 않는 자들은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복은 바로 예수님이 초청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한데나리온씩 약속을 하였는데 어떤 분들은 9시에 12시에, 4시에 5시에 일하러온 사람들도 똑 같이 한데나리온씩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선민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교회에서 40년 30년, 20년, 2년전 임경애 성도님이 오셨습니다. 구원이 같게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유대인들이 화를 내고 예수님께 불평하는 본문입니다.
구약의 랍비들은 이 본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열심히 일했으므로 많은 보상이 있고 늦게 온 사람들은 보상이 적다고 가르치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씩 약속하였으므로 한데나온이나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개척할 때에 많은 주의 종들은 서울에서 개척하면 안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서울은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님께서 목회하고 계시므로 타지역으로 가서 목회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말을 제주도에서 사람은 서울에서 그리고 복음은 서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서울서부지방으로 선택하여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교회에서 한때 많은 성도로 부흥할 때가 있었습니다. 연남동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님 한분이 장로님부부(대원아파트), 권사님한분 성도님들이 우리교회에 올라와서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목사님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자신들끼지 모여서 기도하고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장로를 주지않기 때문에 다른교회로 가게되었습니다. 저는 교회는 사업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이고 작지만 하나님이 영광이 나타는 곳입니다.
- 수자는 비교의식을 만들어냅니다.
마태복음 20장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 아들 평강이가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자신보다 능력이 안되는 아이들보다 월급을 더 못받을 때에 CEO에 찾아가 연봉 협상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보다 물질적인 보상을 받지 못했을 때에 열심히 일할 마음이 없습니다. 마음이 섭섭합니다.
성경 원어적 의미는 사카르 (히브리어: שָׂכָר, Sakar): 구약 성경에서 ‘삯, 임금, 보상, 상급’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품꾼에게 주는 노동의 대가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신앙적 보상을 의미할 때 두루 쓰입니다. (예: 창세기 15:1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미스도스 (헬라어: μισθός, Misthos): 신약 성경에서 ‘삯, 보상, 상급’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어린시절 유년주일학교에서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상급을 받았습니다. 여름성학교 때에 새벽기도회까지 나오면 시상식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상을 받을 때에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상품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했다는 자부심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랍비 문학이나 율법적 관습 속에서는 ‘행한 대로 보상받는다’(인과응보)는 개념이 철저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의롭게 살고, 남들보다 더 많이 고생한 사람은 당연히 더 큰 상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종교적 습관이자 상식이었습니다.
품꾼들이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원망한 이유도, ‘남보다 더 많이 공로를 쌓았으니 더 큰 보상을 받는 것이 세상의 관습’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계약의 ‘사카르’와 은혜의 ‘미스도스’의 충돌합니다. 구약과 유대 관습에서 삯을 뜻하는 사카르(שָׂכָר)는 인간 편에서의 ‘노동의 대가’라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먼저 온 품꾼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종의 쌍방 계약이자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연히 이만큼 받아야 한다’는 관습적 거래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베푼 보상(미스도스)은 그 관습을 초월합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받는 것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합니다. 애초에 아무도 써주지 않아 굶어 죽을 뻔한 날품팔이꾼들을 거두어 주시고, 하루치 생계비(한 데나리온)를 똑같이 보장해 주신 주인의 무한한 자비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에서 베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유대인 바리세인, 서기관들은 상당한 보응을 받기를 원했지만 계약한만큼만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약한 일도 없고 별로 일한 일도 없는데 하나님은 은혜대로 먼저 일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를 그들에게 주었으니 정말 감사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9장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태복음 20장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태복음 19장 30절과 20장 16절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앞뒤로 감싸고 있는 핵심 주제(Inclusio, 수미상관)입니다. 예수님은 이 반복 문구를 통해, 인간의 관습적 보상 개념과 천국의 상급 개념이 어떻게 정반대로 뒤집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두 구절을 통해 강조하시는 것은 “천국은 인간의 공로나 자격을 마일리지처럼 쌓아서 습관적으로 상을 받아내는 곳이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내가 ‘먼저 된 자’라는 영적 교만과 인과응보적 관습에 갇히는 순간 나중이 되고, 나 자신이 늘 ‘아무 자격 없는 나중 된 자’임을 고백하며 은혜를 구하는 자가 천국에서 먼저 된 자가 됩니다.
결론입니다.
이솝 우화의 ‘하늘을 나는 개구리’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가, 물고 있던 막대기를 놓쳐 땅에 떨어져 죽은 개구리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0장의 메시지와 놀랍도록 완벽하게 연결됩니다.
- ‘내 공로’를 자랑하려는 순간 추락합니다.
개구리가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막대기를 들어 올려준 황새(또는 독수리)들의 도움(은혜) 덕분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의 먼저 온 품꾼들도 포도원에 들어와 일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주인이 그들을 가엾게 여겨 불러주신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개구리는 “이 멋진 아이디어를 낸 게 바로 나야!”라고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려다가 추락했습니다.
- ‘은혜의 막대기’를 놓아버리면 죽습니다. 생명줄은 황새가 물어준 ‘막대기’였습니다. 개구리가 살기 위해 해야 했던 유일한 일은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막대기를 꽉 물고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막대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다”, “나는 남들보다 낫다”라는 관습적인 특권 의식과 자랑(교만)이 튀어나오는 순간, 우리는 은혜의 막대기를 입에서 놓쳐버리게 됩니다. 은혜를 놓친 인간의 결말은 영적인 추락과 죽음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