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 22절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2026년 8월 1일 금요철야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세상에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있을까요? 노후 물질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생계에 위협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사업에 대한 실패로 인하여 두렵습니다. 늙고 힘이 없어질 때에 두렵습니다. 예전에 여행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했는데 요즘은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갑자기 질병으로 신체 기능이 약해져서 죽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요즘 연예인의 질병인 공항장애와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깊은 바다 한 가운데 공포등 (필리핀 바다에서).
본문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되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제자들을 급히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하시고, 예수님은 물 위로 걷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병이어로 먹이신 후에 제자들을 재촉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하시고 날이 저물고 바다 가운데 큰 바람과 풍랑이 일 때에 예수님이 바다 위로 제자들에게 오시는 내용입니다. 12제자가 있지만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물 위로 걷는 인류 최초의 사건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셨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인하여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 재촉해 다른 곳으로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 최소 7시간에서 9시간 이상 외롭게 노를 저으며 사투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에 의하면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에서 초저녁 배를 탔다고 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끝나고 ‘날이 저물 때'(마태복음 14장 15절), 그리고 예수님이 찾아오신 시간은 25절에 밤 사경에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약 8시간 정도 배를 저었던 것입니다.
- 사업장 교회가 매일 노를 젖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쇠퇴기를 맞이하여 우리교회는 매일 새벽기도와 저녁에 기도회를 통하여 노를 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년 주일학교,
중고등부 수련회가 없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주의 종들이 결과물이 없다는 자책감 번아웃으로 인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심이 듭니다. 마치 엘리야가 정신적인 번아웃으로 인하여 몸도 영혼도 죽어가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로뎀나무 아래서 살려주시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제비 브라운은 고난은 은혜를 체험하는 자들에게 나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신비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파산하는 자리 (Zero Point)가 곧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개입하는 시작점입니다. 제자들이 어부로서 경험과 체력이 완전히 소진한 후에 나오는 자리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아버지 시대에 목회자들은 절망 없고 힘들었지만 부흥에 대한 미래가 있기 때문에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00명의 개척교회의 목사님중에 오직 한명, 두명의 목회자만 부흥하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우리 지방에 44명의 목회자와 교회가 있지만 오직 한교회만 부흥합니다.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님이 겪으셨던 인생 최악의 밤, 그리고 그 절망의 심연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고백했습니다.
목회와 인생의 절정기에 찾아온,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실제 고통의 순간입니다. 1978년, 슐러 목사님이 한국 집회를 위해 서울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받았던 한 통의 전화. 그것은 둘째 딸 캐롤(Carol)이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아내는 유방암 말기. 평생 긍정적 믿음을 전해왔지만, 자녀들의 아픔과 사역의 한계, 육체의 쇠잔함 앞에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다”며 네바다주의 수도원(트래피스트 수도원)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그 처절한 순간입니다.
그 비극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인생의 폭풍을 통과하는 3가지 영적 진리’의 깊은 의미를 함께 나눕니다.
1) 인정하라 (Accept it) — “한 부분이 아닌,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슐러 목사님은 딸의 다리 절단과 가족의 고통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고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치유는 상황을 왜곡하지 않고 “지금 내게 이 비극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100%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짧은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한 부분’만 억지로 짜 맞추려 하지 말고, 이 고난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더 큰 섭리가 있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현실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단계입니다.
2) 인도자이심을 믿으라 (Believe in His Guidance) — “하나님은 여전히 내 삶을 이끄신다”
폭풍우 속에서도 배의 키를 잡고 계신 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자녀들의 문제로 목회적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모든 결과물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길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거친 파도를 통해서도 우리를 가장 선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Guide)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닙니다.
3) 맡겨라 (Commit it / Surrender)
“내 손에서 힘을 빼고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
내 힘으로 자녀를 구원하려 하고, 내 힘으로 목회를 성공시키려 했던 ‘노 젓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인생과 사역의 주권을 진짜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께 이양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붙들고 있던 자녀의 장래도, 무너진 교회의 현실도, 말기 암의 두려움도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올려드릴 때, 비로소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평강이 찾아옵니다.
- 왜 의심하느냐?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베드로가 물 위로 걷다가 의심한 이유는 주님의 말씀 대신에 거센 바람이라는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출렁이는 파도를 보는 순간 모든 인간은 물 위로 걸을 수 없다는 이성이 작동한 것입니다. 어부의 경험과 인간의 본성입니다. 바람과 바다의 풍랑을 거슬리는 것은 오직 믿음 밖에 없습니다. 의심과 두려움이 밀려오면 믿음이 작해지고 자연현상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도 성경에서 의심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최고의 선지자라고 예수님이 칭찬을 받았지만 마태복음 11장 3절에 정말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의심하였습니다.
도마도 예수님의 손과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도 이세벨의 말 한마디로 광야로 도망쳐 죽기를 결심하였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삶이 단 한 번뿐이어서 우리의 삶을 가벼움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바꿀 수없는 환경, 삶의 무게 때문에 나의 삶의 가벼워 지고 있습니다.
우리 삶이 위대하고 강한 줄 알지만 현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너무 가벼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일회용으로 없어졌다가 다시 사용하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위대하고 고상하고 순교할 만큼 가치 있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나의 모습은 너무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계속적으로 노를 저을 때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의 뜻은 절망의 현장에서 건저주십니다. 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25절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장로님의 사업장에 오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노를 젓는 것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우투스 (간절히 원하다), 무엇을 지나가시는 것을 에델렌(ἤθελεν, 헵에델렌) 헬라어 동사가 있습니다. 에델렌과 파렐데인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나가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상한 말씀입니다. 해석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Karl Barth)의 기독론적 해석이나 구약 성경적 배경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심은 맞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성경의 표현은 지나가시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이 모세 앞으로 지나가시며 영광을 보여주셨고 (출 33장 22절) 엘리야 앞을 지나가셨고 (왕상 19장 11절) 9:11).
욥기 9장 8-11절에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파도를 밟으시며…. 지나가시나 내가 보지 못하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외면하심이 아니라 내가 바로 풍랑과 바다를 다스리는 여호와 하나님임을 똑똑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에고 에이미), 유령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라는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내니(It is I)’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인데,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할 때 쓰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와 같은 신성한 선언입니다.
장로님의 사업장을 그냥 지나가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열심히 기도하시는 장로님을 향하여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업을 운영하다 보면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역풍(불황, 위기, 절망의 현장)을 만나 밤새 괴로이 노를 저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삶의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지 말라”
인간의 유한한 지혜로 하나님의 광대하신 섭리를 다 담아내려 했던 교만과 집착을 내려놓는, 가장 높은 차원의 영적 항복(Surrender)입니다.
이사야 55장 8-9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마태복음 14장 33절의 고백입니다.”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소이다 하더라”
- 계속적으로 노를 저어야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우리 사모와 함께 성미산을 올라갔습니다. 오래만에 올라갔기 때문에 숨이 찼습니다. 그래도 산을 넘어가야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시간, 이제 자신의 한계를 들어내는 시간 8시간 근무, 8시간 배를 저어 인간의 한계에 도달하는 시간입니다.
‘에디 피어슨’은 인생의 거대한 폭풍우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았던 신앙의 고백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금 마주하신 거친 바다와 사업장, 목회의 내려놓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이 보고 계시는 믿음의 여정 중 하나일 것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시는 분께 힘이 될 성경 말씀과 묵상을 전해드립니다.
마가복음 6장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가장 어두운 밤 사경(새벽녘)에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풍랑 속에 계시다는 고백처럼, 때로는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은 거센 파도가 주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작은 믿음은 조금씩 자라나고 단단해집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편 4절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쓴 《축적의 시간》의 핵심은 “개념설계 역량(내공)은 시행착오의 경험을 오랜 시간 스스로 쌓아 올릴 때만 생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공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좋은 설교를 듣고 배우는 것도 과정 중에는 필요하지만, 결국 내 삶의 현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노를 젓는 ‘시행착오와 고난의 시간’이 축적되어야 진짜 내공이 됩니다. 아무런 결과물이 보이지 않는 그 암흑 같은 밤 사경에, 낙심하지 않고 묵묵히 노를 젓는 행위 자체가 영적인 힘을 축적하는 위대한 시간입니다.
〈벤허〉영화는 배 밑바닥의 고난이 만든 맷살(메살라)과 노예로 끌려가 신앙도, 희망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절망의 현장(배 밑바닥)입니다. 내 뜻과 상관없이 강제로 끌려가 쇠사슬에 묶인 채 괴롭게 노를 젓습니다. 그러나 그 비참하고 괴로운 노 젓기의 시간은 허공으로 날아간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배 밑바닥에서 수년간 축적된 그 가공할 만한 팔과 어깨의 근육(내공)은, 훗날 전차 경기장에서 로마의 최고 권력자이자 원수인 맷살(메살라)을 꺾고 승리하는 ‘결정적인 축적된 힘’이 됩니다.
존 웨슬리의 일기
존 웨슬리는 복음의 열정 때문에 영국의 수많은 기존 교회들로부터 설교를 거부당했습니다.
5월 5일 오전: 세인트 앤(St. Anne’s) 교회에서 설교함. “다시는 오지 말라”는 말을 들음.
5월 5일 오후: 세인트 존(St. John’s) 교회에서 설교함.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거절당함.
5월 12일: 세인트 주드(St. Jude’s) 교회에서도 설교를 거절당함.
작은 시골교회와 길거리: 예배당 안에서 설교할 곳을 모두 잃어버리자, 그는 결국 길거리와 광장, 벌판으로 쫓겨나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소들에게 쫓김” 벌판에서 야외 설교를 시작하자, 그를 반대하는 세력과 깡패들이 설교를 방해하기 위해 미친 소(또는 황소)들을 설교단과 군중을 향해 몰아넣는 비열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소들이 성난 채로 달려들었지만, 신기하게도 소들은 군중을 비껴가거나 웨슬리 바로 앞을 지나치며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소들의 위협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기도를 이어가며 설교를 마쳤습니다.
우리 성원순복음교회 안수집사님, 권사님들, 우리 사모가 계속 노를 져고 있습니다. 인계점에 도달하는 시점까지 계속 저어야합니다.
케빈 하니(Kevin G. Harney) 저자의 《무모한 믿음》(Reckless Faith) 책은 안전하고 길들여진 삶 안주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따라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신앙의 모험의 삶을 시작하라고 강하게 도전하는 책입니다.
무모한 믿음》 (부제: 무모하지 않다면 믿음이 아니다), 케빈 하니 (Kevin Harney, 미국의 목회자이자 전 세계적인 기독교 강연가).
저자는 세상의 눈에 무모해 보일지라도 앞 뒤 재지 않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강조합니다. 단순한 무책임이나 만용이 아니라, 기도, 성경의 지혜, 공동체의 조언이라는 확실한 배경을 두고 영적인 모험을 감수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내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내어주는 무모한 사랑, 무모한 바침, 무모한 섬김, 무모한 기도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모험의 길에 동참하고 싶으신 장로님의 갈망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