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장 6절, 하나님의 평강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2023년 7월 14일 금요철야

  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2.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1. 하나님의 평강, 이스라엘의 평강

 

하나님의 평강은 완전한 평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강을 말하지만,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평강을 말하지만 진정한 평화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평화는 무엇일까?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면 3군대를 꼭 방문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중심에 자리 잡은 통곡의 벽입니다. 예루살렘 시내 중심부 언덕에 자리 잡은 예루살렘 성전에는 오늘날 유대인들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은 주후 700년 경에 아랍족속들이 점령하여 이스람 모스코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슬람의 모스크가 된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아 갈 수 없기 때문에 성전 옆 돌담 벽 통곡의 벽에서 기도합니다. 지금도 통곡에 벽에 가면 유대인들이 울면서 기도합니다.

 

둘째는 서해 서편에 있는 마사다 고지입니다. 주후 70년 로마 군인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군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하여 남은 잔당들을 죽이기 위하여 끝까지 좇아간곳이 마사다 고지입니다. 로마인들이 110만명을 살육하여 예루살렘에 사람의 피가 강을 이루었다고하였습니다. 30년전에 십자가를 진체로 예루살렘의 골고다로 오를 때에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극의 예언이 바로 마사다 고지에서 이루워졌습니다. 열심당원들의 아내와 어린아이 모두 960명을

끝까지 항전하여 그곳에서 스스로 자결한 곳입니다.

 

세번째는 예루살렘 시내에 있는 야드베쉼이라는 유대인의 박물관입니다. 유물관은 세계 2차세계대전 때 나치치하에서 죽음을 당한 600만명의 유대인들의 참상을 전시한 곳입니다. 유대인들의 수난의 현장에 남았던 여러 유품들과 사진들, 기록물들이 전시되었습니다.

 

마지막 출구 양 옆 벽에는 어려나라 말로 이와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망각은 수난을 일으키고 기억은 구원이 된다.

 

저희 교회가 건축을 하고 어려웠을 때에 게스트하우스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나라에 온 게스트들이 주로 3군대를 갑니다. 첫째는 경복궁과 근처의 명동을 갑니다. 둘째로 남이섬을 갑니다. 세번째로 에버렌드를 갑니다. 대부분의 동남아 여행객들이 주로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서 온 게스트는 우리나라의 경복궁을 방문하고, 용산의 전쟁기념관과 박물관을 방문하고,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을 주로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격은 고난의 역사를 알기 위하여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직도 하나가 되지 않는 우리의 민족입니다. 손톱으로 자기 얼굴에 상처를 내는 것이고, 이빨이 자신의 입술을 깨무는 것이고, 면도칼로 자신의 손등을 자해하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조심해야합니다. 특별히 러시아를 조심해야합니다. 러시아의 탱크를 가지고 북한이 남한을 처들왔습니다. 러시아 탱크를 가지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렇게 넒은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 더 많은 욕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여러분 세상의 아름다운 꽃들을 보십시요. 꽃은 다른 꽃들과 경쟁하지 않고 자신의 꽃만 예쁘게 피었다고 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삶만 열심히 살아야하는데 마음속에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욕심을 죽이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욕심을 죽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움이라는 사건을 놓고 볼 때에 몇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싸움을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로 싸움을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로 싸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넷째로 싸움이 있어도 모르는체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섯째 직접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인디언을 연구한 이반 코넬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19세기 캐나다인과 미국인이 아메리카 인디안에 대한 정책이 다릅니다. 캐나다 인들은 인디언을 정직하게 대하자 평화롭게 대하자라는 정책이였습니다. 반면에 미국의 정책은 우리처럼 문명인답게 행동하면 평화를 주지만 그렇지 못하면 전쟁한다고 하였습니다.

캐나다 사람들은 인디언과 평화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사람들은 평화하지 않고 같이 싸웠습니다. 미국사람들은 동부에 정착하면서 처음 청교도인과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같이 음식을 나누워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서부로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는 가운데 인디언들과 영토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싸울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케나다 사람들은 싸울수 있었지만 인디언들과 화해하면서 개척해나갔습니다.

 

성경의 정신은 나의 빰을 때릴 때에 오를 빰을 때릴 경우 왼빰까지 들이대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 교회, 목사님들은 이러한 마음이 없스니다. 전혀 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많은 돈을 얻기 위하여 싸움을 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화평은 샬롬입니다. 평화입니다. 싸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샬롬은 마음과 몸이 온전히 평안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화평케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화평을 만드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화평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공격하면 2백 3배로 앙갚음해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찌르는 자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샬롬을 갔다 줍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한자로 화평(和平), 평화(平和)는 두개의 심장이 같은 저울에 나란히 같이 있는 장면입니다. 두 사람이 한 저울에 나란이 있는 모습입니다. 화(和)는 밥이 입으로 들어간다의 의미의 화입니다. 두 글짜를 합하면 두사람의 마음이 서로 화합하여 같이 밥을 먹는 것입니다. 화평입니다. 이스라엘의 샬롬, 우리나라의 진지 잡수셨습니까? 말을 배우고 나서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항상 손을 모으고 ‘진지잡수셨어요?’ 그렇게 인사를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그게 그냥 인사말인줄 알았다. 일어나면 집안에서 만나는 어른들께 ‘안녕히 주무셨어요’로, 밖에 나가면 ‘진지잡수셨어요’로, 대답을 요하지 않는 질문을 했다.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거로 그 말은 좋은 덕담이라 생각했다. 우리 어린 시절의 평화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삶이 다르고 위치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주장이 다르고, 물질의 정도 차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저울위에 올려놓고 같은 위치에 밥을 먹는 의미를 공존이 평화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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