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달라스 윌라드# 주일설교#홍철기목사(유튜브참조)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유라굴라의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전세계적인 광풍 covid19의 광풍도 있고, 개인적인 질병의 광풍도 있고 물질적인 광풍도 있고, 학업의 광풍도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에도 코로나로 인하여 광풍이 불고 있습니다. 코로나인하여 1년 사이에 6천에서 9천개 정도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질병청 통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광풍을 이기나가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 믿음과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통하여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I. 序
3차 전도 여행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이므로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2년동안 벨릭스에 의하여 구금되었고, 다음 총독 베스도에 의하여 재판을 받게됩니다. 특별히 아그리바왕에게도 복음을 증거하면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만난 장면을 간증합니다. 총독과 왕은 가이사에게 고소하지 않았으면 풀어주었겠다고 하면서 배로 사도바울을 로마로 이송합니다.
로마로 가는 배안에는 율리오 백부장과 선주, 선장, 선원들, 죄수들과 사도바울이 항선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조언합니다. 미항이라는 곳에서 과동하자고 합니다(9절). 그런데 율리오는 선주와 선장의 말을 더 믿어 뵈닉스로 출항합니다(11절). 출항할 때에 그들은 순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요나처럼(13절). 그러나 얼마 안되어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됩니다(14절).
광풍을 만나게 되면 인간들이 하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1) 힘쓰고 애쓰더라( 18절), 2) 짐을 바다에 던지고, 배의 가구도 내버리고(19절) 3) 구원의 여망마저 없게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환상, 계시, 직접적인 말씀, 또는 주의 종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26절)
저는 오늘 2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하겠습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 내 곁에 서서 말하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증거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담대하게 이기기를 간구하면 말씀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저는 하나님의 음성, 달라스 윌라드의 책을 중심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II.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의 실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38페이지)
어떤 사람들은 미신,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너무 나가는 것이 아니지요?하고 걱정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스 윌라드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과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저버리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의 실체가 저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괴상한 일이다. 미친 사람을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순복음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일이 사도행전에서 2000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지금은 방언이 필요한가?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방언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고전14장1절)
리빙바이불의 켄테일러(Ken Taylor)는 1983년 1월 31일 오후 하나님이 “문자적 번역이 아니라 뜻을 살리는 번역에 대한 생각을 제시해 주셨다.” 왜냐하면 성경은 너무 어려워서 어린아이들이나 학문적으로 이해가 낮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정확하게 뜻을 살려 번역하라는 말씀을 듣고 번역을 하였다고합니다.
주후 354-430년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 제 8권에서 옆집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어린아이 음성으로 집어들어 읽으라, 집어들어 읽으라는 노래 소리가 계속들렸다합니다. 그때 그가 읽은 것은 로마서 13장 13절입니다.
달라스 윌러드의 형이 목회에 중대 결정을 내리려할 때에 밤즞게까지 기도하다가 새벽 2시경에 그 방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밝게 빛났고, 누군가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주님인신 것을 알수 있었다. 어께에 그분의 손길이 느껴지면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내 양을 먹이라고 그후에 인이 박히다시피한 담배를 부탁 하나 없이 끊었고, 성경공부를 하다가 목회자가 되어 30년 이상 목회하고 있다고 간증합니다.
내가 누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는가? 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여러분들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때로 음성을 들려주실 수 있습니다.
가능한가? 성경의 믿음의 선배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평생에 한번도 못들을 수 있습니다. 들려주시고 안들려주시고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때로 하나님께서 들려주실 수 있습니다.
역대상 7장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III. 하나님 음성의 여러가지 형태
1) 모세 경우 (직접적인 음성)
출애굽기 3장 4절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들었습니다.
2) 사무엘의 경우 (직접적인 음성)
사무엘상 3:4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사무엘상 3:6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3) 다니엘의 경우
다니엘 7장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4) 마리아의 경우 (천사가)
누가복음 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5) 사도행전 27장에서 사도바울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본문)과 사도행전 16장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6) 엘리야의 세미한 음성
열왕기상 19장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IV.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우리의 동기가 잘못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러고 하는 인간의 마음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자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합니다. 또한 들리지 않았는데 거짓말로 자신이 들었다고 간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사용함으로서 여러움을 당하는 성도들과 목사님들을 보았습니다. 간절함과 사모함으로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셔서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였는데 한순간에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만 매달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성도들이 떠나고 자신도 선교사로 떠나는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저의 목회사역 가운데서도 그러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기도원에 간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응답을 받고 돌아옵니다. 예로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하여 3개월간 기도원에 간적이 있습니다. 금식을 하여도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짖는 일에 자가 스스로 하나님께 결재를 맞기 위하여 기도원에 간 것입니다. 21일동안 금식을 하는데 15일째 항문에서 피가 나오고 토하고 하여 금식을 포기하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기도하는데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금식을 하는데 금식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에 은혜가 되지 않았습니다. 금식했으니 교회를 건축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혹시 내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도 고생하고 성도들도 떠나고, 병들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하게 된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주시는 음성은 언제나 마음의 평안이고 그리고 환경 가운데 열매가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짖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뜻이 앞세웠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V.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1) 늘 마음이 청결하고 그리고 세상의 모든 오락과 여러가지 성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모세는 40일동안 시내산에서 금식하고 하나님을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전에 있는 진설병을 먹는데도 여자와 관계를 하지 않았으면 먹으로고 제사장이 이야기하는 성경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 성전의 음식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앞에서 깨끗하고 정결함을 유지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남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직접나가지 못하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11)
2) 사모해야합니다.
철학자 세레카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그림의 떡은 떡이 아니다. 붙지 않는 불은 불이 아니다. 간절하지 않는 기도는 사모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목숨을 건 전투와 같습니다. 기도가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 겸손해야합니다. 벧전 5장 5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하였습니다. 모세는 역사상 가장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마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늘 자신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4) 분별해야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하는데 나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잡소리를 듣게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연애인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안들린다고하여서 다른 사람들도 안들린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제거한다면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책이고 교리책인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주의 백성들과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고 죽게하심으로 여러분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하나님의 전이 여러분의 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VI. 하나님의 음성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60대로 보이는 여성 노숙자를 종종 만나게됩니다. 홍대를 걸어갈 때나, 망원동 시장을 걸어갈 때입니다. 특별히 여의도순복으교회 기도원 버스앞에서나, 성전 주변에 늘 노숙자가들이 있습니다. 저들도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는데 지금은 함께 하고 있는 자들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좋은 관계를 갔기를 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리요(로마서 8장)
모든 외로운 이들은 그들은 다 어디에서 온 것일까? 외로운 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입니다. *엡2장 12절, 소망이 없고, 하나님이 없는 자들입니다.
일생동안 한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한 번도 기적이 없었고, 다윗에게도 기적이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적은 몇번 안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주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 것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심으로 느낌과 생각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평강이가 성장하기 전에는 엄마 아빠가 어떤 옷을 입으라고 지정하여 줍니다. 그러나 성장하고 난뒤에는 자신이 자신의 옷을 입습니다. 아빠 엄마가 어떤 옷을 입으라고 가리켜주면 그건 간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평강이에게 가장 큰 문제점이 있을 때에 엄마 아빠로 부터 조언을 듣습니다. 그것도 가끔씩이지 자주 듣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아서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처럼 로봇처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음성은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가고자하는 방향으로 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쪽으로 가지 않으면 요나처럼 방향을 바꿀수 있는 풍랑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유라굴로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학교수와 어린 학생이 있습니다. 보는 책의 내용이 다릅니다. 대학교수는 그림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동화책 속에는 그림으로 가득차있습니다. 왜입니까? 글을 읽는데 어렵고 그리고 이하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린 아이들이 조금씩 그림보다는 글이 많은 쪽으로 옴겨갑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마찮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에는 기적도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하고 신앙이 장성해졌는데 계속 어린아이처럼 그림책만 고집하면 하나님의 표적과 기적만 고집하면 어린아이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장성한 신앙으로 살기 위하여 생활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feel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나라에 초창기에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는 수많은 표적과 기적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가? 그들이 이해하고 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표적과 기적을 보여주시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위함이리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게는 꼭 표적과 기적이 없어도 예수님을 잘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일상적으로 살아간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숙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임재만 느낌으로 feeling으로만 느껴도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은 된장끼게 먹을까요? 김치끼개 먹을까요? 하고 묻는 것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아무거나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씨앗을 심어놓고 거문 자주 파보면 썩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두면 잘 자라는 것입니다.
결론
역사가 H.C 월즈가 쓴 단편집 <대주교의 죽음>을 보면 의미심장한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어느 대주교가 그날 밤도 습관처럼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눈앞에 빛이 보이면서 신비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듣는데, 그래 무슨 일이냐?” 그 소리에 너무 놀란 나머지 대주교는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는 소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음성듣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서움과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음성이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우리가 억지로 자랑하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거짓말 하거나 이단시 너무 타부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들려주시면 듣고, 들리지 않을 때에 주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