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말로 은혜아니면 살아갈수 없는 세상입니다. 코로나19의 기간중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둘째로 경제적인 어려움없이 살아가는 것이 은혜입니다. 셋째로 죄인이면서 용서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정말 은혜입니다.
서울 강서구 한 아파트 단지에서 길고양이 시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79대 할아버지의 소행입니다. 지하주차장에 고양이 6마리를 숨지게 하였습니다. 이유인즉, 고양이들의 울음소리로 인하여 잠을 못잔다는 것입니다. 카보퓨란(살충제종류)로 중독성이있는 물질로 죽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 하나님이 조금만 신경에 거슬린다고 하여 죽인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광주 학동에서 어느 시내 버스는 살고 어느 시내버스는 죽고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세상의 미래를 알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1. 序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고 30세가 되기 전까지 종살이 그리고 감옥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살이 감옥생활 가운데도 은혜를 주셔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바로의 꿈을 해몽하므로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꿈의 해석대로 7년동안 풍년이 들게 되었고 7년동안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얻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식솔들도 다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동생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줄을 꿈에 모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용서가 먼저인가 은혜가 먼저인가?
은혜가 먼저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경우 은혜을 받고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들을 용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원순복음교회에서 원복래안수집사님이 오래동안 헌신해오셔서 이제 장로님으로 피택하려고하는데 다른 분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재복집사님, 김혜자집사님, 강송훈집사님, 김옥자집사님 모두 부족하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나니 목사 네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5년에서는 제직 임명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가족들이 들어와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새가족이 들어와서 집사로 세우는 것은 교회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데 지방회에서 허락하고 외부목사님들이 오셔서 예식을 집행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할 때 모든 분들이 함께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다른 교회 제가 근무했던 큰 교회는 기준이 있습니다. 십일조의 기준이 있고, 주일출석, 전도 한 분 이상, 그리고 성경학교, 성경대학, 성경대학원을 나와야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과 규례를 따리기 보다는 은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와 하나님이 바라는 사항은 제직 임명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이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더 열심이 주일성수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금요철야, 새벽기도회 등과 같은 예배에 참석하여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수 있는 것입니다.
3. 인생을 살아갈 때에 본질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직임명의 본질)
스페인 왕이 될수 있었던 그레나다 황태자는 정적에 의하여 반역자로 종신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마드리드 감옥의 독방에 들어가 평생동안 그 감옥에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감옥에서 할 일이 없으니 성경을 읽고 또 읽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자가 발견한 것은 시편 118편 8절이 성경의 가장 중앙에 있는 절이고, 에스라 7장 21절은 알파벳이 다 포함되었는데 J자만 없고 에스더 8장 9절은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3절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분 그분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만 안디옥에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로아로 복음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입니다.
잉거솔이라고 하는 대령과 또 한 사람은 월래스라고 하는 장군이었다. 두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비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친구를 주제로 에로틱한 연애 소설을 쓰면 돈을 많이 벌겠지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후 제대후 윌래스는 잉거솔대령이 말한대로 성경을 읽고, 이스라엘 직접가서 예수님의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성경을 읽고 자료를 모으면 모을수록 그의 마음은 변화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인 실존인물이면서 참 자신의 구주로 느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글을 쓰여지게 되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벤허라는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벤허(Ben Hur)” 본질을 발견한 것입니다.
4. 용서와 은혜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세상을 산다는 것은 방향제 뿌리듯 그렇게 달콤한 관념적 이상이 아닙니다.
어릴적 주일학교에서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요셉이 형들과 화해하는 장면의 우여곡절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요셉은 형들을 옥에 가두며 엄하게 대하다가도 금방 슬픔을 못이겨 자리를 떠서 술 취한 사람마냥 엉엉 울었다. 곡물 자루에 돈을 숨기고 형 하나를 인절로 잡고 동생에게 은잔을 훔친 죄를 쒸우는 등 술책도 썼습니다. 이런 숙책은 몇달이고 혹 몇년이고 계속된다. 드디어 요셉의 자제력이 한계에 이른다. 요셉은 형들을 불러 놓고 극적인 용서를 베푼다. 요셉이 용서해야 했던 형들은 바로 요셉을 해꼬지 하며 죽일 방법을 찾다가 노예로 팔아넘긴 동생 요셉인 것입니다. 요셉은 한창 젊은 시절에 애굽의 감옥에서 썩어야했습니다. 이제 모든 역경을 이겨 내고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뜻이 있는데도 선뜻 행동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아직도 상처가 있어서 한 행동이 아닐까 합니다.
창세기 42-45장은 요셉이 그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끝내 은혜가 요셉의 심령을 파고 들자 그 사랑의 울음소리가 온 궁전 안을 울립니다. 이 울음소리가 웬 것인고 총리가 병이 났는가. 아니다. 요셉의 몸은 말짱했습니다. 그것은 한 남자의 용서의 울음소리입니다.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바로가 왕이 듣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마음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크게 울고 끝내자하는 마음이고 그동안에 고생에 대한 설움에 대한 울음이였을 것입니다.
어느 젊은 크리스찬 부부의 이혼이야기입니다. 결혼전에 어떤 여성과의 사귀고 혼외 정사에 대하여 솔찍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부부사이에 사랑에 대한 증오의 싸앗이 마귀가 뿌린 것입니다. 남편과 사랑을 나눌 때마다 이 남자가 처음 사랑한 여자가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늘 들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시초가 되어 이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해야합니다.
인류의 최초의 성문법 하무라비 법전에 말한 것, 그리고 성경 말씀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로나는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다압니다.
학교의 아이들이 다 배우고, 나도 만인도 알고 있는 것, 누가 너에게
악을 행하면 너도 같이 악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이 시를 쓴 오든은 본성의 법에는 용서의 자리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람쥐가 자기들을 좇아 나무가지 올라 오는 고양이를 용서한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동물들은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도 용서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1077년 교황 그레고리 7세에게 용서를 빌기로 한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헨리 4세는 이탈리아 교황 속소 밖에서 눈 속에 사흘을 맨발로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황제는 용서의 성혼으로 발에 동상을 입고 흡족한 기분이 되어 돌아갔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오코너는 우리는 용서에 대해 수 없이 설교를 들어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며 쉽게 용서받지도 못합니다. 새삼 느끼지만 용서란 언제나 설교로 듣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용서란 집안 싸움이 대물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 원수같은 집안에서 자녀들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집안으로 반대로 인하여 슬픔에 빠진 로미오는 독약을 먹고 자살합니다. 로미오의 시체를 안고 오열하던 줄리엣은 로미오의 단도로 가슴을 찔러 죽고 만다. 두 가문은 자신의 사랑하는 자식들이 가문간의 싸움 때문에 죽게 된 사실을 알게 되고 둘의 장례를 치르며 화해한다는 내용입니다.
세상은 마치 이와같습니다. 주님 저를 날씬하게 할 수 없거든, 제 친구들을 뚱뚱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태복음 6장 12절 ) 말씀하고 있습니다. 찰스 윌리엄은 주기도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구절의 ‘같이’라는 단어가 짧고 간결한 단어이지만 이것 보다 무서운 단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는 용서와 남에게 베푸는 용서를 명백히 하나로 묶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15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란 칸트가 이야기 했듯이 자격있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용서의 단어는 이러합니다. for give 누구를 위하여 주다입니다.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에게 큰 사랑과 용서를 받았으니 나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바로 이 용서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용서의 도구로 예수님을 주셨고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받기만 하면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예수님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가족이나 친구들도 세상사람들이 다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방인들까지 우리가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주변에 있는 잘 아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을 자랑하는 일은 조금 더 어려운 것입니다. 용서는 이와같은 사람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종의 금전적 손실을 문제 삶으신 것이 아니라 그 손실을 이미 그에게 수십억대 큰 돈을 탕감해 주신 주인에 빗대어 보셨을 뿐이다. 먼저 용서 받은 경험이 있어야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법입니다.
스콧펙 교수님이 학생중에 유대인10명, 그리스도인10명, 이슬람10명을 참석시켰다. 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공동체의 태동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결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교육도 받고 지성인들 사이에서 거의 주먹다짐까지 일어날 지경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자기들에게 저지른 못된 일을 줄줄이 읊었고, 이스람교인들은 유대교가 자기들에게 저지른 못된 일을 늘어놓았고, 기독교인들은 어떻게든 사랑과 화합하는 것으로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나치 대학살, 팔라스타인 난민 참성에 밀려서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습니다.
용서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용서란 상호교환하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먼저 ‘시작해야돼’라는 것부터 말하기 때문에 용서는 아무런 시도도 없이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당한 건 나인데 내가 먼저 왜 나서야하느냐고 합니다.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그러나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원한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용서란 믿음의 행위입니다.
5. 그리고 은혜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본문은 미움, 악, 허물과 죄 용서, 울음, 악을 선으로 바꿈, 구원,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겠다라는 단어로 구성되었습니다.
중국선교사로 일했던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샘 모팻의 이야기입니다. 모펫은 휘튼 학생들에게 공산군에 쫓겨 도망친 진땀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산군은 모펫의 집과 재산을 다 빼앗고 선교본부에 불을 지르고 가장 가까운 친구 몇명을 죽였다. 모팻 가족은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모펫은 중국을 떠날 때 우두머리 모택동의 추종 세력에 대해 속에서 깊은 적개심이 부글 부글 끓었다. 마침내 그는 신앙의 일대 위기를 부딪혔다. 그는 휘튼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공산군들을 향한 용서가 없다면 내가 전할 메시지도 가짜입니다. 예수님이 용서라라고 했는데 용서없이 설교하는 것은 거짓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식을 습득하고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자신이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금의 형상을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오서 부서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형성한 모든 인류의 역사를 허물고 예수님의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저절로 다 습득되고 모든 것이 다 잘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60, 70, 80, 90살을 살아도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이 습득하지 않는 것은 이루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성도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성경도 깊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또 뜨리고 성경을 계속읽고 힘들고 어려운 기도를 매일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즐거운 드라마, 좋은 음식, 그리고 술이 있는데 우리의 삶속에서 먼저 영성을 경건의 연습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속에서 노력하고 행한 것만 나에게 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한보배 빛난 보배 주 예수님의 보배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론은 세상 사람들이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말씀이 다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또한 세상의 학문과 이성을 다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과 믿음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지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많은 기독교 목사님이 백신을 666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이성과 과학과 의학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역입니다.
세상의 이성과 학문의 미지로 향할 때에는 우리는 때로 두럽습니다. 그럴때 과학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로 향하는 암스토롱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였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과학과 믿음으로 이겨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안전하듯이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안에서 모험과 고난이 안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오실 때에는 연약한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오실 때에는 능력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도 그러합니다. 처음에는 연약한 자들을 구원하여 택하시고 그들로 세상의 능력자가 되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경에 보면 장남 가인보다는 차남 아벨을, 므낫세 장남보다는 에브라임 차남을, 아론보다는 모세를 라합과 룻과 밧세바의 outsider를 시대의 중심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성원순복음교회는 작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요셉처럼 강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하나님의 부흥의 때가 되면 능히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는 교회로 발전시킬 수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