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장 1절 가치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2025년 4월 금요철야
-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 서 序
인간의 삶은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30세까지 세상의 교육을 받는 시기
2) 60세까지 세상에서 일하는 시기
3) 90세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을 의미있게 정리하는 시기
저는 마지막 90세까지 목회를 하면서 책을 몇 권 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보다 더 많은 역량있고 능력있는 성도들입니다. (지금은 설교준비로 하지 못합니다.) 집에서 소일거리를 하면서 세상을 살기 보다는 좀더 보람있는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붕어빵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동참하십시다.)
어느 철학과 교수님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시기는 어느 시기일까? 75세 이후의 시기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몸은 점점 쇠하여 가지만 머리는 쇠하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줄어가지만 머리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는 시기입니다.
오늘 본문 아브라함은 75세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르에서 75세까지 열심히 살다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새로운 가나안 땅의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지만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옴기게하시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인생은 빨리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인생은 방향이 중요합니다. 옳바른 방향입니다. 우리 방향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빨리가고 있다면 정말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으로 세상의 향락으로 목적을 삼고 있다면 잘못된 길로 매일 빨리가는 것은 비참한 현실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은 바로 인생의 가치관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김형석교수님이 젊은 시절에 월남하여 넉넉지 않는 시절에 오랫만에 강의를 부탁받았습니다. 그런데 지방에 교사 500명 정도의 분들의 강의도 중복되었습니다. 교수님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방에서 강의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 가까이에 있는 기업체에서 강의할 것인가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가장 가치있는 것은 돈보더 가치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사분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세대를 책임질 분들에게 자신의 삶의 경험들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종교 철학,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어린시절 방공교육을 받고 살았습니다. 우리 선생님들이 공산당은 싫어요하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성경학교, 어린이 예배를 중심으로 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나님이 제일 좋아요 사상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우리 시대에는 군부의 탄압으로 인하여 우리 대학생들은 공산당보다는 군부의 독제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정부에 대항하는 마음이 들어서기 시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부정적인 세력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씨앗이였습니다. 그 씨앗들이 이제 자라기 시작하여 30대에서 시작하여 지금 64세가 되었습니다. 5.18의 잔혹함, 학교수업보다는 학교정문에 벽돌을 던지면서 전경들과 투쟁하면 살았습니다. 저녁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막걸리집에서 자취방에서 여러가지 이야기속에 정부에 반하는 내용들을 이야기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 사람들이 30대, 40대, 50대, 사람들에게 민주화 세력을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업, 영화등 모든 부분에서 이러한 사상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한 사회에서 가치관의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교회가 다시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고 방식으로 바꿔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 네게브
-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네게브는 어느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입니다. 이곳은 거친 사막 황무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농업하는 사람들을 살지 못합니다.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이 살만한 곳입니다.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명의 정탐꾼을 보내면서 남방길 즉 네게브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네겝(네게브)와 가데스 바네아 가사까지 정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네게브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통로입니다. 솔로몬은 네게브를 장악하여 아라비아와 시나이, 애굽, 에데오피아의 무역의 통로로 만들었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남방이라는 단어가 63개 사용되었는데 이곳이 네게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 기근
창세기 12장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세기 12장 10절에 그 땅에 기근이 들어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지는 가나안인데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사람들은 기근이 오면 가치를 세상으로 두고 세상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향으로 선회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방향으로 방향을 돌려 집으로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하기 어렵다고 세상과 타협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의 선진들은 최고의 가치를 순교에 두고 신앙생활 하였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애굽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애굽에는 화려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내려갔던 것입니다. 롯도 역시 소돔과 고모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남쪽으로 내려운 신앙의 선진들이 대한민국에도 있습니다. 한경직목사님, 김창인목사님, 박조준목사님, 김선도목사님, 김홍도목사님, 김국도 목사님, 1945년도 신의주에 계셨던, 새문안교회 원로목사님이신 강신명목사님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새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후렴>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
-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처음 정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세월이 지나면서 자신이 처음 열심있는 신앙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저 어린 시절에 미아들이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대공원이나 동물원에 가면 어린 자녀와 함께 다니다가 어린 자녀의 손을 놓고나 따라오는 줄 알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평강이를 잊어버리고 경찰서에 신고하고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 장모님에 핸드폰에다 그리고 손에 워치를 체워드려도 종종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잊어버리면 일단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안절 부절하니 아무데나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할 때에는 반드시 처음 장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꾸 돌아다니면 모두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신앙의 방황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난 장소로 올라가야합니다.
외국 여행을 할 때에는 가이드를 따라가야 합니다. 선교여행을 할 때에 그곳 지형을 잘 알고 있는 선교사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탈하면 미아가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이 직접 뽑은 집사님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업무가 과하여 사도들은 설교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게 하고 일곱집사님들이 그 행정일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행정일도 잘하고 성경에 대한 박식함으로 늘 주변에 시기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하여 거짓증인들을 내세워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한다는 누명을 씌워서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는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스데반을 돌에 맞게 죽게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후에 성 아고스티노에 의하면 죽은 이를 살리고, 스데반 제단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병자가 낫고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엘리사가 죽은 후에도 다른 시체가 그의 뼈에 닿자 회생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왕하 13장 20~21절
고 김수환 추기경이 스데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평강이 외국 친구 중에도 이러한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 다시 처음 제단을 쌓은 곳으로 가야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시기를 원합니다. 야곱도 벧엘에 올라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오는 자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한 교회가 바로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행전 19장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헌신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3년동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니라 (사도행전 19:11~12)
얼마나 열심히 목회를 했으면 헤어질 때에 너무 섭섭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겠습니까? 그곳에 아볼로가, 그리고 디모데가 목회한 곳입니다.
그곳에 신앙점점 약해져서
요한 계시록 2장에서는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우리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합니까? 바로 첫사랑을 회복하는 가치로 두어야합니다. 물질에 가치를 두면 교회에서 헌신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희생하지 않습니다. 헌신하지 않습니다.
-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더라
-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사람들은 힘들 때에 하나님을 가까이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많아지고 풍성해질 때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힘들고 어려웠을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 찾아가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풍요해질 때에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도움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부족하여 연약함을 알고 일천번제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번제를 드릴 때에 얼마나 어려운 줄 아십니까? 또한 천번 예배를 드렸습니다. 천번, 천날? 하였습니다. 그 때에 가장 귀한 하나님의 지혜가 그에게 임하여 수많은 부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에 부가 찾아왔을 때에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부와 우리의 신앙생활은 동거하기가 어렵습니다. 넉넉할 때에 양보애야합니다. 넉넉할 때에 더 겸손해야합니다.
넉넉할 때에 하나님 하나님을 더 생각해야합니다. 더 넉넉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합니다. 넉넉할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