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2장 1절 주일설교 눈으로 주를 뵙옵나이다.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1.
서울서부지방회 최종권 회장님이 성경의 맥과 핵이라는 책을 주셨는데 그 책의 첫머리의 내용입니다. 한 청년이 쿵후를 배우러 소림사의 유명한 스승을 찾아가 다짜고짜 쿵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하지만 청년의 기대와 달리 마당쓸기 3년, 장작패가 4년, 청년은 무술과 상관없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데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다 그만두고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꾹꾹 참고 10년을 버텼습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을 때에 소림사를 찾은 의욕과 폐기와 뱃짱이 어디론가 다 사리지고 마음을 비우고 장작을 패고 있는데 스승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이제 쿵후를 배울 준비가 되었구나”
청년이 설레는 마음으로 도복을 갈아입고 마당에 섰을 때, 스승님은 고난도 무술의 시범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 어려운 고급 기술들이 너무 쉽게 가볍게 그냥 되는 게 아닌가? 지난 10년의 시간의 마당쓸기, 물 긷기, 장작 패기의 훈련들이 다 쿵후를 배우는 기초과정이였다는 것을 …. 10년의 내공 덕에 지금 이 고난도 무술을 척척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날부터 청년의 쿵후 실력은 수직 상승하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당대 최고의 무술인이 되었습니다.
공부 (工夫 공부,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입니다. 한자어론 장인공에 지아비부, 공들이다의 뜻이 아닙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 공돌이라는 뜻입니다. 즉, 공부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힌는 공돌이라는 뜻입니다.
공부 한자어 工夫는 중국어로 쿵후라고 읽습니다. 공부는 쿵후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진짜 공부 잘하는 사람은 버락치기로 대충 시험 성적이나 잘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내공을 쌓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을 해냈다는 자신감, 성취감입니다. 어려운 것을 즐기는 여유와 흥미진진함 등을 갖춘 실력가되는 것입니다. (군대의 짭밥, 그리고 회사 생활의 노하우)
신앙생활은 바로 처음부터 급진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와 같은 것입니다. 물깃기, 장작패기등 10년의 세월이 흘러야합니다. 그래야 내공이 쌓이고 모든 것을 비웠을 때에 그 때부터 무술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목회생활도 같은 원리입니다. (야곱의 14년)
목회를 하면서 봄날을 기다리면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일차로, 임태종목사님의 식구들이 다 떠날 때에, 이차로, 용희, 선옥, 수진, 고은, 현남, 범석이 떠나고 삼차로, 박선옥집사님의 식구들이 떠날 때에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릅니다. 어깨에 힘이 빠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살았습니다. 쿵후(목회를 배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의 어깨에 힘을 빼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2. 이 때에 우리 권사님과 욥기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욥은 동방 사람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1장 3절), 욥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3절) 스바 사람이 와서 칼로 종들을 죽임,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과 종들을 살라버림(16절), 집 네모퉁이를 치며 자녀들이 죽음(19절),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고 (22절)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3장 25절)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5장 7절), 의인은 그길을 꾸준히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17장 9절), 욥의 상태는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19장 20절). 욥은 모든 것을 잃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트집잡는자 하나님을 탓하는 자 대답해라. 욥이 대답합니다.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고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마치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한 행동과 같습니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대답합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고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 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욥기서 38장에 계속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합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하는 자가 누구냐?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하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아마 욥은 속으로 하나님이시죠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렀습니다. 고난 그것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일부분이고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인류의 생사화복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마귀도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욥기서와 아가서
욥기와 아가서를 정경으로 인정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고심했다고 하였습니다. 아가서는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포로노 수준의 책입니다. 솔로몬이 구스여인 술남미에 대하여 사랑으로 표현한 글이 조금 난에 합니다. 여성의 가슴, 배꼽, 그리고 음난한 부분까지 자세히 묘사함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보다는 음난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욥기서입니다. 욥기서는 성경에서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여러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욥기서를 하나님의 정경에 넣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욥기서와 아가서를 성경에 집어넣었습니다.
4.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책 두권을 소개하려고합니다.
1) 나이트라는 책입니다.
엘리 위젤은 1944년 15세의 나이로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을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쓴 책 나이트(nigth)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려운 순간에 어디계십니까?
2) 위젤의 제자중에 아리엘 버거가 쓴 나의 기억을 보라의 내용에 나오는 책입니다. 아리엘 버거는 엘리 위젤이 보스톤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에 수강했고 조교로 일하면서 교수님에 관한 내용을 적은 것입니다.
■ 먼저 엘리 위젤 지은 나이트 (night)입니다.
일주일 뒤 작업장에서 돌아와 보니 수용소 한가운데 집회소에 검은 교수대가 세워져있었다. 평소보다 인원 점검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직감했다. 수프는 그 뒤에야 배급될 것이다. 명령이 다른 날보다 엄했고, 이상한 불안감이 감돌았다. 탈모, 수용소장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1만여 명이 일제히 모자를 벗었다. 착모 모두 번개 같이 모자를 썼다. 수용소문이 열렸다. 친위대가 나타나 세 걸음 간격으로 우리를 애웨쌌다. 망루의 기관총이 집회소를 향하고있었다. …
제국의 지도자 힘러의 이름으로 수감번호 000는 공습 중에 물건을 훔쳤다. 법에 따라 수감번호 000를 교수형에 처한다. 모든 수감자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소장이 신호를 보내자 카포가 젊은 사형수에게 다가갔다. 수감자 두 명이 도왔다. 수프 두 그릇을 훔친 대가였다. (page119)
어느날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회소에 갈까마귀, 곧 교수대 세 개가 세워져있었다. 인원 점검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친위대가 우리를 에워쌌고, 기관총은 우리를 겨누었다. 수감자 세명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 중 한명은 슬픈 눈을 한 어린 천사 피펠이였다.
친위대는 여느 때보다 긴장한 듯 보였다. 수천명이 보는 앞에서 어린아이를 목매달아 죽이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였다. 수용소장이 판결문을 읽는 동안 사람들의 눈은 그 아이에게 쏠려 있었다, 소년은 낯빛이 창백했으나 평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교수대 그림자를 밟고 선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번에는 카포가 교수형 집행을 거부했다. 친위대 세명이 집행관으로 나섰다. 사형수 세명이 의자 위로 올라갔다. 그들의 목에 일제히 올가미가 걸렸다. 자유만세 두사람이 소리쳤다. 그러나 소년은 말이 없었다. 자비로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가 내 뒤에서 물었다. 신호가 떨어지자 의자 세개가 넘어졌다. 수용소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지평선 넘어로 해가 지고 있다. 탈모 소장이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우리는 모두 흐느끼고 있었다. 착모 우리는 희생자 앞을 지나갔따. 두 사람은 이미 숨을 끊어졌다, 그들의 혀는 축 늘어진 데다 부풀어 오르고 푸르스레했다. 그러나 세번째 밧줄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가벼운 그 아이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다. 소년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30분 넘게 몸부림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우리는 가까이서 소년을 보아야만 했다. 내가 지나갈 때도 소년은 살아있었다. 혀는 아직도 불었고 눈도 여전히 감가지 않았다. 내 뒤에서 아까 그 사람이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그날 저녁 수프는 시체 맛이 났다.
■두번째 책 아이엘 버거의 책 나의 기억을 보라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한 인간의 인생을 두고 사탄과 내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구약 성경에 포함한 것이지요? 조프가 말했다. 이 이야기를 그냥 혼자 읽을 때와 실제로 인간의 고통을 다루면서 읽을 때의 느낌은 굉장히 달라요. 저는 의대생이라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본 경험이 있는데 그럴 때 마다 그게 구약성경이든 뭐든 고통과 관련된 어떤 설명도 그저 보이는 대로 받아들일 수 없더군요.
하나님 역시 그런 일종의 대리 고통을 겪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이 고통속에 있는 모습을 보며 고통을 받지요. 이모아노치 브츠라 히브리어로 내가 그와 함께 있다라는 뜻입니다. 누군가 고통이나 굴욕을 겪을 때 그와 함게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끔찍할 정도로 고독한 존재이며 무소불위의 권능을 지닌 존재지만 전 세계 모든 인간이 겪는 아픔과 고통을 함께 겪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할 때조차 하나님을 향한 연민을 느낍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누구인가? 위젤이 대답했다. 아마도 아담이겠지요? 왜냐하면 창조 당시 그는 유일한 인간 외로운 인간이였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외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어떨까요? 이삭도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네요. 친 아버지에 의해 제단 위에서 살해 당할 뻔 했으니까요? 그러자 그의 스승 리버만은 그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누구냐고 물으니? 하나님 자신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주었는데 너희는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라고 답변하였습니다.
■ 기독교적으로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죽을 때에 가장 비참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창조 서사시인 길가메시나, 에누마 엘리시를 보면 인간에 대한 자비나 배려가 없습니다. 신들에 마음에 드는 인간만 편애하고 영웅들로 만듭니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도 프로메데우스는 신들의 우두머리인 제우스를 거역하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었다고 영원히 형벌과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일종의 동반자의 관계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도 이삭의 관계에서도 야곱의 관계에서 그러합니다.
위젤교수의 아버지는 무덤을 판 뒤 하나님을 향해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시험하고 계시다는 걸 잘 압니다. 제가 절망해서 신앙을 포기하는지 확인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그렇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하나님을 계속 사랑하고 있다고 아우슈비치에서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야? 내가 앞서 이야기한 것 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든 함께하지 않든 그 시절과 그 장소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요. 그러지만 나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기도했고 할아버지가 기도했고,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기도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 기도의 맥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침묵이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아버지는 뭔가 다른 모습으로 반응했습니다. 바로 저항의 신앙입니다. 반항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충성을 버리지 않는 신앙이지요. 나는 이런 신앙을 상처 입은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키그케고르는 신앙이란 잃었다가 다시 찾아야 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잃다라는 말을 상처로 바꾸고 싶습니다. 살면서 한 번쯤은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경건파의 한 스승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합니다. 상처 입은 마음만큼 온전한 마음은 없다. 나는 상처입은 신앙만큼 온전한 신앙이 없다고 믿습니다. 상처입은 신앙과 저항은 욥기의 주제이며 위젤 교수는 구약성경에서 욥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욥기에서 하나님과 사탄과 내기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되고 결론은 하나님사탄를 이기는 장면으로 끝이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하여 조절하고 절망할 수 있지만 그것을 참고 이기기는 아름다운 힘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주신이도 하나님이고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재산, 건강 심지어 자녀들까지 다 잃었지만 하나님을 저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친구들이 그를 위로를 하기를 위하여 모여들지만 친구들이 하는 위로란 결국 신학적으로 정죄형태를 빌려 그의 고통을 인정하는 것인데 의로운 사람들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들은 벌을 주는 신명기의 말씀과 정반대의 사상이 여기에 있어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네가 잘 살았으면 왜 하나님이 너를 저주하겠는가? 신명기 28장 1절이하에 보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아지 왜 저주를 받는지 욥기서에서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관안에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합니다. 애굽에 있는 히브리민족의 탄식을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코로나 한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탄식소리를 듣고 계시고 성원순복음교회의 탄식도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들 고통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삶은 고난을 위하여 낳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 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 눈으로 봅니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론 부분에 욥에게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고난은 이 창조의 섭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 그곳에 포함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을 때에 보는 눈을 제일 위쪽에다가 두셨습니다. 가까이 보지 말고 멀리보라는 것입니다. 뒤에 두지 않고 앞에 두셨습니다. 꿋꿋하게 앞만 보고 나가라는 뜻입니다. 속담에 사람의 값이 100냥이면 눈이 90량이라고 하였습니다. 눈은 영혼을 머무는 곳이고 눈은 큰 보배입니다. 내 몸의 창입니다. 눈을 이야기할 때에 안목이 생기고 세상을 관찰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욥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제 귀로들었는데 이제 말씀으로 눈으로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눈으로 본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과 느낌입니다. 똑똑 하나님을 본 사람은 오직 모세입니다. 모세도 등밖에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히브리어적인 표현은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귀로만 이야기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이제 내가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가운데 침묵하실 때가 많이 습니다. 욥에게도 침묵하셨고 많은 선지자와 목회자에게도 침묵하셨고 그리고 말없이 죽어가는 선교사님들에게도 침묵하습니다. 일본의 소설 침묵에서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침묵후에는 분명히 우리가 눈으로 하나님을 뵙수 있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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