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삶을 돌아보면 나이가 들 수록 친구들의 개념이 점차 달라지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의 친구와 성년이 된 후의 친구, 그리고 노년이 되어서 친구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친구는 중고등학교 친구입니다. 어려서 아무 생각없이 만난 친구들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만난 친구가 아니라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난 친구입니다. 어떠한 이익이나 도움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만난 친구들입니다. 어쩌다가 대전에 내려가면 아주 가까운 친구 한 두명에게 연락하는데 지금 완전히 연락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친구는 신학교 다닐 때에 만난 친구들입니다. 바로 김종국목사님과 윤정열목사님입니다. 어려운 시절 신학교시절에 함께 어려움을 격었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게 친구와 만날 수 있습니다.
김종국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충청북도 진천이라고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불교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 때에 진천에 감리교회가 생겨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철야예배, 중고등학교 예배 모든 예배를 참석하였고 새벽기도회까지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불교집안이라 우리집이 망한다고 하면서 핍박하였습니다. 제사는 누가 드리냐고 하면서 부모님이 반대하였습니다. 어머님이 책가방을 버리고, 성경책을 불태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날 방에 불을 때지 않았고, 수요예배에 예배드리고 있는 친구를 끌고 나와서 때리고, 형은 몽둥이로 때리다가 허리를 다치게 되었고, 부모님과 형이 대문과 방문을 잠그면 담 넘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고 3 때 수능시험을 보고 난 뒤에 눈이 멀게 되었고, 동내 병원에서 고칠 수 없다고 하여 서울에 큰 병원 갔는데 고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병원 복도에서 오산리금식기도원에서 7일간 금식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산리금식기도원에 올라가 7일 금식 후에 주님께서 만나주셔서 병을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이 온 식구들을 모아 놓고 오늘부터 우리는 교회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40년동안 신앙생활하다가 두달 전에 소천하셨습니다. 아직 아버님이 살아계시는데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셨고, 치매로 고생하고 계십니다.
저와 만나 교제한 친구는 약 40년전에 apts에서 만나게 되었고 40년동안 지금까지 계속 필리핀에서 선교를 돕고 있습니다. 신학교를 세우고, 필리핀 목회자들을 한 곳에 모아서 세미나를 하고 체육관에서 기도운동을 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어느날 편도선암 4기라는 판정을 받고 일년 전에 수원에 있는 아주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데 길면 1년 안에 죽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죽는 날까지 선교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제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와주고 있습니다.
세번째 친구는 우리 사모입니다. 아내와는 친구요, 동반자요, 함께 늙어가면서 의지하는 평생 친구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평강 출생하면서 수술하는 순간, 학교에서 정년퇴임하는 순간, 여행을 제주도 여행하는 순간들 죽을 때까지 목회를 돕는 동반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를 얼마나 오래 살게 하실지 모르지만 사는 날 동안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예수님은 나의 친구입니다. 제가 출생하기 전부터 저를 부르시고, 저를 인도하신 예수님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친구들은 내 주위를 멀어지고 떠나지만 예수님은 더 뚜렷이 나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의 친구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친구 되신 예수님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욥의 친구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참 좋은 친구의 조건입니다.
1) 고난 가운데 함께하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욥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 욥을 만나기 위하여 왔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입니다.
사람이 어려울 때에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진짜친구와 가짜 친구의 구별은 바로 고통가운데 있을 때에 찾아오는 친구입니다.
친구라는 영화를 보면 자신의 조직을 위하여 친구를 살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친구도 돈이 많을 때에 친구로서 유지되지만 자신이 돈이 없으면 친구를 유지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여러울 때에 돕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목사님 저는 젊은데 아직 친구가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만 아는 친구는 어느 누구도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친구는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간에 좋아할 때에 친구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내가 친구가 되고 싶어도 상대방이 친구가 되기를 원치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뢰에 앞아서 자신 만 아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버려야합니다.
또한 친구는 신뢰가 있어야합니다. 좋은 친구는 약속을 잘 지키고, 좋은 친구든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힘들 때에 어려울 때에 변함없는 신뢰를 가지 친구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2) 친구가 어려울 때에 함께 울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욥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멀리서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욥이 어렵게 되었음을 알고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자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리며 머리에 제를 뿌렸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친구는 친구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예수님의 제자이며 친구인 가룟유다, 친구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입을 마추는 가룟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하니 가룟유다는 입을 맞추고 가룟유다와 함께 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 끌고 갑니다.
친구가 어려움을 당하면 말없이 침묵하면 함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을 위하여 친구들이 밤 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아서 욥의 고통을 지켜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교회 성도가 되기 위하여 아품으로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해야합니다.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어느 농부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서둘러 나가 보니 왕의 전령이었습니다. “왕께서 급히 부르시니 당장 짐을 챙겨 우리와 가자.” 농부는 큰 상 아니면 큰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령에게 부탁했습니다. “친구들을 잠시 만나고 오겠습니다.”
서둘러 친구들을 찾아가 왕궁에 함께 가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첫 번째 친구는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실망한 마음도 잠시, 두 번째 친구를 찾아가 부탁했습니다. 친구는 왕궁 앞까지 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했습니다. 평소 관계가 소원했던 친구를 찾아가 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왕 앞까지 동행할 것이니 마음 편히 함께 가자고 하는 게 아닙니까.
농부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물질 친구는 장례식장까지만, 우리 가족들은 장례식장에서 장지까지만 그러나 예수님 친구는 하나님 앞에까지 우리와 동행해주십니다.
욥의 세친구들의 결론은 이러합니다.
욥기 16장 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욥기 19장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세상의 친구들은 위로하러 왔지만 위로가 아닙니다. 세상의 친구는 슬픔에 동참하지만 진정한 슬픔을 위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친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III. 예수님의 나의 친구
요한복음 15장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설교 본문에 합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0장에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람입니다. 후에 다윗은 그의 자녀 므비보셋 자신의 식탁에 초대하여 요나단의 우정을 지킵니다.
어린 시절 중고등부 다녔을 때에 우리 사모님이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예화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옛날 그리스에 절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중 한 친구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잡혀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형수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전해졌습니다. 곧 사형을 당하게 된 청년은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죽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형수의 친구가 나서더니 자기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 있을 터이니 친구를 집으로 갔다 오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왕은 사형수의 친구에게 “만약 네 친구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기꺼이 자기가 대신 죽겠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그 친구를 대신 감옥에 가두고 사형수에게 나흘간의 말미를 주고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면 갔다 올 수 있는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나흘째 되는 날이 저물어 가도 그 사형수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감옥에 갇힌 친구는 자기의 친구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사형 집행시간이 되자 왕은 “자 보아라, 네 친구는 너를 배신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너는 네 친구를 믿고 있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는 아직도 내 친구를 굳게 믿고 있으며, 그는 아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오게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드디어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교수대에 그를 매달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사형수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오면서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내 친구를 풀어주십시오”하고 외치면서 쓰러졌습니다. 왕이 늦은 이유를 물으니 돌아올 때 큰비로 강물이 불어나서 도저히 강을 건널 수 없어 늦었다고 그 까닭을 설명하였습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왕은 두 사람의 참된 우정의 모습에 감탄하여 두 사람 모두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18: 24)
예수님은 여려분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여러분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저주에서 축복으로, 질병으로 부터 치료를, 가난에서 축복으로, 포로에서 자유를, 눌린 것에서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