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장 21절 새벽기도회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2025년 5월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
하나님은 행함으로 믿음을 입증한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하시고 하나님의 벗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벗의 의미는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으로 대우하셨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축복하시며 상급을 베풀어주십니다. 벗으로 삼아주십니다.
야고보는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25절을 보겠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은 기생이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믿음에 근거한(수 2:8-13) 행함이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자(使者)들을 도피시킨 것은 신실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듣고 판단하여 행동함)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는 말은 라합이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신실한 믿음을 인정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그녀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날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친척과 더불어 구원을 받았으며(수 6:23),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마 1:5).
그래서 후대에 신앙의 모범적인 인물로 언급이 되고 히브리서의 믿음장인 11장에 그녀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히 11:31). 믿음의 전당
주의 형제 야고보가 아브라함(유대인)과 대조적인 라합(이방인)을 예로 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고, 믿음에 따르는 행함을 보시고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천국에 갔습니다. 성경대로 천국 문이 진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습니다. 힘껏 두드리니 문이 열리며 베드로가 나타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집사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천국에 들어오려면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가지고 있습니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증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정합니다. “증표를 찾아도 없네요.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저는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베드로는 단호히 말합니다. “증표 없이는 안 됩니다. 믿음의 행함도 없이 교회 마당만 밟고 다녔으니 무슨 증표가 있겠습니까? 그만 돌아가십시오.”라며 천국 문을 닫아버립니다.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이름뿐인 집사가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신실한 일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든 이야기이지만 교훈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교훈입니까? 신앙생활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바로 믿음의 증표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립니다.
본문 26절을 보겠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온전한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가 따릅니다.
구원을 확신하고 어디서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 누구에게나 유익을 주는 믿음, 상급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에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온전케 함이라.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너희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영훈목사님 설교를 듣고 실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불교와 같이 산 속에서 명상하고 앉아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내 감정의 의식구조, 행동 등 내 전체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말하기를 “최대의 행운은 자신의 전 능력을 들여서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농군 학교에서 불교의 승려가 보름동안 훈련을 받게되었다고 합니다. 교육을 받은 후 이 승려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앉아만 있는 부처를 부수고 호미를 들고 서있는 부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행위의 종교입니다. 서양 격언에 “나태는 신자의 무덤이다“고 하였습니다.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
설원이라는 중국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맹수지만 의심이 많아서 머뭇 머뭇하여 실천하는 일이 적은데 , 그렇다면 벌이나 반딧불이 독을 쏘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은 헛된 이론만 숭상하고 실상이 없는 것은 시원치 않은 사상과 말로 실행한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형편에 따라 잘도 인용하면서 실제 행동을 보면 한심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여우는 조그마한 벌 한 마리 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경상도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던 한 목사님이 서울에 있는 교회의 초대를 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다.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설교는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주었다. 예배가 끝날 때 설교를 하신 목사님이 축도를 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설교 맨치로 살라꼬 다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항상 함께 하실찌어다.” 웃음으로만 넘기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 축도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인가? 말씀이 없어서인가? 그렇지 않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함이 문제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많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화려함과 요란함은 있지만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