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장 1절 새벽기도회

성원교회 홍철기 목사

2025년 5월 10일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는 사람의 완전 평등을 말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빈부의 차이나 신분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차이로 인하여 사람을 차별 대우를 하는 일들이 모든 사회에서 실제 있어 왔습니다. 이는 그 국가 그 사회가 살기 좋은 곳인가, 나쁜 곳인가에 대한 척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빈부나 신분을 중시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는 물질의 풍요는 신의 축복이요, 가난은 신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은 물질의 부유함을 누릴 뿐 아니라 사회에서 존경과 대우를 받아왔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그 가난하고 육신에 병든 것도 서러운데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정죄 받고, 사회에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유대인들에게서는 더욱 심했습니다.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로 생각하여 가까이 하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경멸했습니다. 반면에 부유한 사람들은 그 부요를 누릴 뿐 아니라 사회에서 존경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들 사는 사회는 의식들이 많이 깨었지만, 여전히 유전은 무죄가 되고, 무전은 유죄가 되는 일이 성행합니다. 이것은 공정해야할 법정에서조차도 여전합니다. 곧 권력 있고 부유한 사람은 큰 죄를 지었음에도 얼마 후에 너그러운 판결을 받아 사면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누가 그를 변호해 줄 사람들도 없기에 그가 무죄함에도 큰 곤혹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과 함께 멸시 천대를 받기 때문에 더 억울한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랑을 말하는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차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일들이 교회 안에 버젓이 일어나고

 

어쩌면 그 때에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이 교회 안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것을 당연시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무시, 차별대우를 받아도 그저 숨 죽여 살았을 것입니다.

 

그때는 사도들이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에 대하여 돌아보라고 하면서 언급한다는 것 조차 큰 파문이 될만한 일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야고보는 교회 안에서의 형제가 형제에 대하여 외모를 보고 판단하고, 차별하는 일은 잘못된 죄임을 지적하고, 그 죄를 범치 말 것을 엄하게 명령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이렇게 무시를 당했고, 저주받은 자, 또 죄인 취급까지 당하는 때에 이 말씀이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때의 모든 잘못된 사회적 분위기를 밝게 하는 빛과 같은 말씀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빈부의 차이로, 또 신분상의 차이로, 교회 안에서 무시되고,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오늘 우리 주변에는 없습니까? 또 우리 교회 안에는 없습니까?

야고보의 권면이 오늘에도 필요한 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런 일로 성령을 근심시켜 지적을 받고, 어린 신앙생활하는 형제들을 실족케 하는 일들이 여전히 우리 중에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주일 아침 예배에 술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이 예배 드리려고 들어왔습니다. 그 때에 우리에게 이 말씀이 적용됩니다.전도를 하면 술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교회로 나오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믿음을 가지면 자연히 끊을 것이라고 하고 교회로 나오라고 해서 겨우 그 분을 전도해서 예배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랬는데 옆 사람이 무슨 냄새가 나니까 흠흠하면서 담배 냄새를 소리까지 내어 맡고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교회 오면서…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술 담배 금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의 신앙생활의 고백적인 행위로 거룩한 삶의 한 행위로 술 담배를 금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교회에 오는 분들의 그런 사소한 정말 이 구원과 비교할 때에 아무 것도 아니라 할만한 사소한 행위 때문에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여 그 자리를 어서 떠나고 싶게 만든다고하면 우리는 그 영혼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거지가 예배를 드리려고 와서 앉아도, 그 옷에 온갖 오물이 묻어 있어도 외모로 보지 않고 그 사람을 집으로 영접하여 씻기고, 입히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이것부터 해야합니다. 아주 쉽다고 생각하면서 무시했던 주님의 계명, 이를 지켜야합니다. (증조할아버지)

 

그러나 성도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안됩니다. 그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 우리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누구를 믿는 믿음을 가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은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에 먼저 우리들이 마음에 생각할 것은 주님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을 받은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 같이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사람보다 영광의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자가 외모로 사람을 대하지 않습니다.

 

영광의 주님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영광은 은혜를 입은 자가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주님께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결코 우리를 외모로 보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에 주님께서 우리를 외모로 판단하여 부르셨다면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과연 주님을 감동시킬 만한 그런 아름다운 삶이 있었습니까? 주님은 과연 우리를 외모로 보시지 않았습니다. 외모를 보고서 우리를 불렀다면 우리가 지금도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우리들에게 외모가 없었습니다.

 

외모는 우리의 선천후천의 자격, 지식, 부요, 선행등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들은 오히려 주님을 떠나서 죄악 중에 거하여 마귀의 자식으로 주님과 원수 되었었고, 연약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에, 또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속제물로 보내주시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이 주님을 영광의 주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은혜 베푸신 주님을 믿음으로 주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엡 2장 1절이하)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실 때에 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조차도 다윗의 형들의 신장과 용모를 보고 하나님께서 세우실 자가 이들이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세상에 오실 때에 외모를 갖추어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친히 외모로 판단하는 자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보기에 흠모할만한 외모의 가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도살할 양 같이 여기고 마음대로 조롱하고 때리고 침뱉고 욕하고 고난을 주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고 다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수모를 당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 당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은혜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로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지지리도 못나고 죄인된 우리들, 가난하고 병든 우리들을 오히려 택하시고 불러 주셨으니,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광의 주를 믿어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결코 우리 형제들에 대할 때도 우리들도 주님을 생각하여 사람을 외모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에 이 주님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의 그 은혜를 잊으면 안됩니다.

 

 

둘째는,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약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고마우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볼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주여서 영원히 누리도록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는 데는 인간 편의 어떤 노력이나 조건이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먼저 전파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어떤 능력, 부유하고 잘난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미련한 자, 가난한 자, 멸시받는 자, 없는 자를 택하여 세상의 것으로 부하고 능력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는 아무도 그 가진 것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가난 자체가 덕은 아닙니다.어쩌면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 일 수도 있습니다.또 세상적으로 부유함이 부끄러운 것이나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부함이 정죄를 받거나 악일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들이 복음에 대한 열망이 높을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를 찾는 마음이 뜨겁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은 그들은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교만한 자를 꺾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에게는 재물을 소유케 하시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주의 은혜로 구원의 선물을 주심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게 하십니다. 참으로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믿음에 풍성하게 하시고, 내세에서 하나님 나라까지 유업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가난할지라도 자신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부요한 자가 된 것과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소유한 이 사실을 깨달아 자신의 높음을 자랑해야합니다.세상적으로 부요한 자들은 자신에게 있는 부요함이 과연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누기 위함이요, 그것으로 부요함을 누리는 것 보다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한 부요함을 깨달아서 겸손해야합니다.

 

그러므로 풀과 같이 시들고 말, 없어질 물질의 유무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됩니다. 오늘에는 인생의 목숨을 파리 목숨 같이 가치 없이 여깁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를 단지 육신의 생명이나 물질의 부유함에다 둔다면 성경은 말씀하시길 코에 호흡 있는 자를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하십니다. 아침에 잠간 보이다가 없어질 인생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인생의 가치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생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깨달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 때문에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며 대우해야합니다. 나사로 같이 남의 집 문간에서 얻어먹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외모로 보면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십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생인 것을 알아 대우해야합니다.

 

또한 인생의 가치는 그리스도께서 인생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속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 우리는 이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요, 이 사람을 위해서 주님께서 피 흘려 죽으셨다 라는 깨달음으로 대하여야합니다.특히 주님께서 귀중히 여기는 성도를 우리가 가볍게 귀찮게 여기면 주님께서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나만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요, 내게 무시하고 외모로 판단하고 있는 바로 그 형제를 위해서 돌아가셨으니 그 한 사람을 실족케 하면 그 벌이 얼마나 크다고 했습니까?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트리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실을 생각해서 판단해야합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께는 각자에게 대한 뜻이 계시고, 관심을 다 가지시고, 개별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인생의 존재의 목적, 의미를 성경에서 찾아야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찾아야합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찾아야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에서 찾아야합니다.

셋째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 차별대우하는 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또 죄라고 해도 마음속에 있는 죄요, 지극히 작은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계명을 최고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높은 법, 인간관계의 법 중에 가장 중요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이웃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원수 갚는 것도, 형제에 대하여 원망하는 것도, 죄라고 지적하십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이 계명을 가장 중요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생을 사랑하여 당신의 몸을 주신 참 사랑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본 윤리는 이 사랑에 있습니다. 이 사랑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하여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사랑으로 교회가 성립되고, 유지되고,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와 하나님의 큰 계명을 모르고 짓는 큰 죄라는 인식을 가져야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을 하나 어긴 것 쯤은 죄라고 하지 도 않는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약2: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약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약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사람을 무시하고 사람에 대하여 판단하며,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여 대우하는 죄를 어떤 죄라고 했습니까?그 죄가 ‘살인한 죄’라고 했습니다. 네가 이 율법을 범한 자이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비록 간음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살인하면 모든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육신을 해하거나, 그 생명을 죽이는 것만 살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파괴하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을 살인한 죄라고 하십니다. 말로써 글로써 행동으로써 사람을 죽인 일은 없습니까? 인격을 파괴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이 무서운 죄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죄에 대하여는 받을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계명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결국 이는 범죄요, 죄를 범한 자는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 같이 이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우리가 말 한마디를 하면서도 “이 말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행동하나를 하면서도 “이 행동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함부로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 하나님의 심판은 중심까지 다 보시고 판단합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중심에 그 사람의 외모를 보고서 차별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미워하고 죽이려는 마음까지 가질 수 있습니다.만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죄를 많이 범하겠습니까?

 

(약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전에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했습니다. 이 율법주의는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정죄에 이르게 하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에 이 율법에 자유했습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자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한 자로서 이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으로 진정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감격으로 이 거룩하신 법을 지켜야합니다. 그러면 이 율법을 지키는 자가 참으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 율법을 유대인들이 잊어버리고 옛 사람의 율법에 얽매어 다시 정죄받고, 얽매이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은 자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긍휼을 행하는 것도, 이미 자신이 받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피동되어 사랑과 긍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즉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도들로 하여금 사랑의 의무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긍훌을 받아 구원을 얻은 자 되었으니 구원을 얻은 자가 또한 긍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사랑을 받았으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사랑을 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만 아닙니다. 이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의지의 결단이 없이는 사랑의 실천은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를 위한 희생과 수고는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감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진실로 말뿐인 믿음, 입술의 고백뿐인 거짓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라고 고백합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라고 감사드립니까? 그 고백이 우리의 실제 만나는 삶에서 나타나야한다는 것입니다.

 

긍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사실을 믿으십니까?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긍휼의 마음을 가집시다. 주님의 마음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 네 가지

첫째로, 영광의 주를 믿는 믿음을 우리가 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외모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가장 심각한 범죄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행위는 심판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다 헛된 믿음입니다. 경건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미 듣고 우리가 다 아는 바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한 것을 찾아 회개합시다. 고칩시다. 순종하여 실행할 때에 그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실행하므로 영육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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