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장 13절

성원순복음교회 홍철기목사

2026년 3월 6일 *어머니 여수로 가시는 날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믿음은 생애의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파스칼의 내기’라는 유명한 철학적인 논증이 있습니다. 당신은 신이 있다는 쪽에 걸어라, 신이 존재하는지 증명할 수 없다면 확률적으로 신이 있다는 쪽에 걸어라 훨씬 유리한 도박이다.

신이 진짜 있을 경우 믿었던 성도는 무한 행복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무한 고통입니다.

신이 없다면 믿었든 안 믿었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살아있을 동안 종교활동에 쓴 시간과 노력이 있을 뿐이다.

결국 이겨서 얻을 보상은 무한한데 져서 잃은 것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신이 있다는 쪽에 인생을 거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 전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전쟁 중인 트럼프는 어떠한 결과가 어떠한 결과가 일어날지 몰랐습니다.

중동전쟁으로 최소한 6명의 미군 사망, 미국 대사관의 테러 등 강력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경제적인 어려움, 전쟁이 계속된다면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베트남의 전쟁처럼 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스데반) 그리고 감옥에 가두는 것이 충성인 줄 알았습니다.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뒤에 회심하여 이방인의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선교 여행 중에 에베소에 이르렀습니다.

제3차 전도 여행 (본격적인 사역): 에베소를 중심지로 삼아 약 3년 동안 머물며 사역했습니다. 이 시기에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강론하였고, 에베소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 에베소에서의 소동

은장색 데메드리오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다이아나)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은 세공업자인데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큰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닙니다”라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가르치면서 다른 표적이 일어나고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직공들을 모아 우리의 영업이 천해질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 복음을 증거한 바울을 이 땅에서 내쫓자고 하였습니다. 분노한 군중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들이여, 아데미야!” 하면서 바울과 동행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연극장으로 끌고 가서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에베소에 있는 서기장이 법적인 절차를 따라서 군중을 진정시키고 마무리 시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니 사람들이 한 행동은 은 5만 드라크마(또는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마술책을 불태웠습니다. 약 한 데나리온을 노동자 일당으로 생각하여 약 5억 원 정도의 돈을 불태웠습니다. 엄청난 책들을 태운 것입니다. 산만큼 큰 책들을 태우면서 온 에베소 시가 완전히 복음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럴 때에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을 태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경판의 수가 8만 장입니다. 불교에서는 8만 번의 번뇌를 씻어 준다고 하여 8만 4천 법문을 수록하였다고 합니다.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하여 16년에 걸쳐서 제작된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은 과학적 보존 원리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보를 태웠다면 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화재보호법 제92조에 따라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해집니다. 숭례문 방화범은 10년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특별히 막대한 복구 비용을, 특별히 문화재에 낙서만 해도 수억 원의 청구 비용과 복원 비용을 낼 수 있습니다.

교구장의 일입니다. 어느 초신자가 자신의 집 베개에 그리고 지갑에 넣고 다니는 부적을 불태울 수 없어서, 무서워서 해코지할 것 같아서 목사님이 해결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신동아 아파트에서 작정 예배를 21일 동안 드렸는데, 그곳에서 술병을 없애고 부적을 없앤 기억이 있습니다.

교구장으로서 성도님의 영적인 두려움을 돌보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초신자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의지하거나 두려워했던 대상을 제거하는 것이 큰 심리적 압박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신동아 아파트에서의 21일 작정 예배 경험은 이번 사역에도 큰 영적 자산이 될 것 같습니다. 당시 술병과 부적을 제거하며 승리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사역을 진행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딤후 1:7)임을 강조하시며 성도님을 안심시켜 주십시오. 그것이 아무런 힘이 없는 종이 조각일 뿐임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적을 없앤 후 성도님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당분간 정기적인 심방이나 기도로 그 마음을 굳건히 붙들어 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마다 마음의 밭이 다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 각각의 성도들의 마음의 밭이 달라서 열매를 맺기도 하고 맺지 못하기도 합니다.

길가 밭처럼 마음이 굳어 있으면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가고,

돌짝밭처럼 뿌리가 얕으면 환난 때 넘어지며,

가시떨기처럼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가로막히면 결실하지 못합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 즉 말씀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누가복음 8:15)가 될 때 비로소 사람이 바뀌고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적으로 고민하는 초신자도 두려움의 돌짝밭의 돌을 치우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기경하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 사도행전 19장 24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아데미 신전은 우리 교회 옆에 있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처럼 큰 경기장입니다. 약 7만 명이 모여서 관람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느부갓네살 동상을 세우고 그곳에서 절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신상으로 인하여 마음의 평안과 복을 받게 하는 신상입니다.

아데미 신전에 매년 5월이면 여신의 탄생을 기념하여 ‘아르테미시아(Artemisia)’ 또는 ‘에페시아(Ephesia)’가 열렸습니다. 5월 6일 아데미 여신의 생일을 기점으로 신전에서 시작된 대규모 행렬이 시내를 관통했습니다. 흰 옷 입은 여사제들과 남사제들이 마그네시아 문과 연극장까지 이동합니다. 수천 마리의 황소와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립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인파를 위하여 연극과 음악 경연, 운동경기가 한 달 내내 이어집니다. 아데미 신상을 항구의 바닷물에 씻는 정결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큰 행사를 못 하게 만든 바울을 철천지원수처럼 여기고 그를 죽이려는 소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 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1.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데메드리오의 마음속에는 오직 돈, 장사, 물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던 것입니다. 우리 성원순복음교회에서 능력이 나타나서 관음사, 성림사의 스님들이 소동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업종끼리 갈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나 불교에서는 같은 업종이라고 하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같은 업종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업종입니다. 생명이 있는 기독교와 생명이 없는 종교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월초파일에 현수막을 걸지 않습니다.

<최강야구>의 김성근 감독님이 선수들에게 전한 핵심 철학이자,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메시지네요. “돈을 받으면 프로다”, “야구가 안 되면 돈을 못 번다”는 말은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인생 전체를 걸라는 엄중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한가닥 했던’ 은퇴 선수들이 자칫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 빠질 때, 감독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지요.

이 메시지를 우리 영적 생활에 비추어 보면 더욱 깊은 은혜가 됩니다.

인생을 거는 태도입니다. 아마추어는 즐거움에 그치지만, 프로는 생존을 걸고 정진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단순히 ‘취미’나 ‘위안’으로 하는 ‘신앙의 아마추어’가 아니라, 생명과 인생을 거는 ‘복음의 프로’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목회에도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같은 연습을 수만 번 반복하며 몸을 만드는 야구 선수들처럼, 우리도 매일 기도의 무릎을 꿇고 말씀을 묵상하는 거룩한 반복을 통해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안일함과의 싸움입니다. “이 정도면 옥토 밭이겠지” 하는 안일함이 가장 무섭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인생을 걸고 승리하려는 그 간절함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적을 버리지 못해 떨고 있는 초신자에게도 이 ‘프로의 정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적당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생을 거는 결단이 있을 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진정한 프로 신앙인으로 거듭날 테니까요. 저는 생명을 걸었습니다. 우리 모든 돈을 이곳에 투자하였습니다. 교회를 지을 때에는 모든 전셋돈을 교회 건물에 투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4.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5.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6.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7.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8.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9.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10.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상황을 정리하면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군중을 선동했지만, 정작 소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그 자리에 데메드리오의 주도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는” (행 19:32) 혼란만 남았습니다. 고발은 했으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군중 심리만 가득했습니다.

소동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바울과 같은 기독교인으로 오해받아 피해를 입을까 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를 내세워 변명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저 바울과 상관없다”며 선을 그으려 했습니다 (행 19:33).

바울은 복음을 위해 연극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제자들과 아시아 관리들이 말렸고, 정작 소동을 일으킨 자들은 책임 회피에 급급했습니다. 결국 이 소동은 서기장이 나타나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법대로 하라”며 법적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을 경고하자 비로소 흩어지게 됩니다 (행 19:38-40).

교회를 지으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헌신했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우리 가정만 복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떠났고, 많은 사람들은 나 몰라라 하였고 외면하면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회를 지을 때에 주변에 많은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백송빌라에서 세탁소의 주인이, 그리고 밑에 집 할아버지의 가정에 많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시간 동안이나 광기에 사로잡혀 소리치던 군중을 잠재운 것은 종교인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직했던 행정 관료 ‘서기장’이었습니다. 그가 바울의 편을 든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어서가 아니라, 관료로서 ‘정직한 원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서기장은 바울 일행이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않았고, 여신을 비방하지도 않았음을 공포하며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데메드리오야, 억울한 게 있으면 정식 재판을 청구해라. 이런 불법 집회는 오히려 너희가 처벌받을 일이다”라고 꾸짖으며 소동을 종결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믿지 않는 정치·행정 관료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세상은 소란스럽고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정직한 원칙과 질서를 통해 결국 당신의 종들을 보호하시고 소동을 잠잠케 하십니다.

‘반전의 은혜’를 나누실 때, 성도님이 느끼실 가장 큰 위로는 무엇일까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준비되시길 응원합니다.

에스더서에 나타난 결정적인 반전(Reversal) 포인트는 세 가지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결단의 반전): 포로 출신 고아 소녀가 제국의 왕비가 되어, 민족의 멸절 위기 앞에서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생명을 걸었습니다.

하만의 나무와 모르드개 (위치의 반전):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세운 50규빗 높이의 나무에 결국 하만 자신이 매달리게 됩니다(에 7:10). 대적의 흉계가 그대로 대적에게 돌아가는 통쾌한 반전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부림절 (운명의 반전): 유다인들이 몰살당하기로 정해진 그날이 오히려 대적을 물리치는 승리의 날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에 9:22)라고 기록합니다.

 

결론입니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왕을 붙여주시고 오늘 본문의 관리를 부터주심으로 완전히 상황이 정리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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