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3: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서
아버지와 아들들이 빙판길을 걷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의 옷소매를 붙잡고 걷게 되었고,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 도움을 요청하여 듬직한 손으로 자신을 잡아달라고 하였습니다.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그만 두 아들이 미끄러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붙잡은 둘째아들은 미끄러지는 바람에 아버지의 손매를 놓고 그만 미끄러지게 되었고, 큰 아들은 미끄러지는 찰라 아버지의 강력한 손으로 공중으로 끌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아버지의 손을 내가 붙잡느냐, 아니면 내가 주님을 완전히 의지하여 주님이 손을 붙잡아 주시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다리는 성도들은 내 힘으로 붙잡으면 신앙생활이 피곤합니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지대로 내 생각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한 팔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팔에 붙잡힌 우리들은 주님이 강한 힘에 의하여 이끌려가기 때문에 언제든지 힘있게 살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을 구원한 테바 (tebah)
출애굽기 2:3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테바는 어린 모세를 담았던 모세의 갈대 상자입니다. 더 이상 집에서 집에서 키울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 악어떼가 우글거리는 나일강 물 위에 눈물로 띄워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갈대상자는 때 마침 강변을 거닐던 이집트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권력의 핵심부에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덕분이였습니다.
이스라엘 인구가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이집트인들은 남자 아기는 나일강에 익사시키고 어린 여자 아이는 살려 두어 출산 후 인구 조절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엄마는 더 이상 그를 숨길 수 없게 되자 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으로 보냈습니다. 이 바구니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는 테바(tebah)이며, 이는 노아의 방주에서처럼 “방주”에 사용된 단어와 동일합니다.
이 두 방주는 매우 다릅니다. 모세의 방주의 길이는 아마도 1야드 정도였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150배나 길었습니다. 모세의 방주는 나일강의 갈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편백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둘 다 공통점이 있었는데, 둘 다 가라앉지 않도록 역청, 피치나 타르로 덮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방주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라는 동일한 것을 상징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의로운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모세의 방주는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신 후에 한 나라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두 방주 모두 구원에 관한 것,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배에 탄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역할을 하며 세상을 궁극적인 방주인 십자가로 인도했습니다.
십자가는 오늘날 죄의 바다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이 당신을 기다리는 반대편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방주를 보내십니다. 탑승만 하면 됩니다. (생명줄 던저 찬송가)
한 가족을 구원한 테바
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3: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미국 켄터기 주 윌리엄 타운에 가면 2016년 7월에 오픈한 이후 매년 10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핫(hot)한 관광명소 장소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의 실제 크기로 재현해 놓았는데 높이가 7층 높이인 51피트 (15.5미터), 길이가 축구장 면적의 1.5배인 510피트 155미터나 됩니다. 가히 세계 최대의 목재 건축물이라 일컬어집니다.
왜 사람들은 이 배를 배라고 하지 않고 방주라고 할까요? 배와 방주에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배는 돛이나 노를 이용해서 자율적으로 움직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주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체 동력도 방향 타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냥 떠 있기만 할 뿐이지 그 안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40일간의 홍수로 인하여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겨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홍수 속에서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망망대해에서 마치 자로 잰 것처럼 최고봉인 아라랏산 정상에 도착하여 거기에서부터 인류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덕분이였습니다.
(창세기의 후손들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라헬, 아렛, 에녹, 므드셀라, 라멕, 노아 (9대손)에 의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
나라와 민족을 맡깁니다. (테바)
사무엘상 6장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장6절)
엘리 제사장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 행실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훈계하지 않아서 블레셋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 위하여 블레셋 지역에 독종이라는 재앙을 내립니다. 그로인하여 이스라엘로 언약궤(법궤)를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블레셋 땅에 있은지 일곱 달이 되던 때였습니다.
이 언약궤 때문에 우리에게 재양이 임했나 임하지 않았나 시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멍에를 메지 아니한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를 끌고 와서 언약궤를 싣고 벧세메스 지역으로 보내는 장면입니다.
우연한 일인지 아니면 우연한 일인지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가는 길에서 법궤를 시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찮은 젖나는 두 암소가 펼처지는 장면들을 보고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운전하는 사람이 없고 누가 지시한 일도 없는데 하나님의 손길로 법궤가 벧세메스로 가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운행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마지막 테바는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만나기 위한 특별한 장소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 같이 내 힘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상징물들이었습니다.
노아의 방주, 모세의 갈대상자, 법궤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오직 그분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구원과 안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있습니다. 이것이 테바의 은총이요 테바 인생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인류를 구원한 테바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 22장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누가복음 23장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기도합니다. 갈대상자, 방주, 언약궤 (법궤)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 처럼 예수님의 삶 속에서도 나의 원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손으로 움직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큰 소리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숨지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 모든 인류의 구원의 피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모세의 역청으로, 방주의 역청으로 쓰인 것 같이 오늘날도 주 예수의 보혈의 피는 우리를 세상의 악한 세력에서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의 질그릇에 있으니 우리가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 낙심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이 바로 테바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가 살기 위하여 예수님의 테바 안으로 들어가야합니다. 테바속에서는 내가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운전하시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섭리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물은 심판을 의미 하지만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하는 것은 모세의 갈대상자, 노아의 방주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교회의 테바 안으로 들어가야합니다.
하나님의 손길보다 더 강한 것이 없습니다. 천사도 죽음도 높음도 깊음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속에서 광야에서 오천명을 먹이시는 능력, 병든자를 치료하시는 능력,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지만 그 것도 아버지의 원대로 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도 아버지의 원대로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아버지의 원대로 되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도, 죽음도 아버지의 원대로 된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도 아버지의 원대로 죽으시고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였습니다. 우리의 사람도 아버지의 원대로 사는 삶이 바로 태바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손에 지극히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매일 아침마다 자녀를 깨워서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챙겨서 학교로 보내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마치 악어떼가 우글거리는 나일강 물에 갈대 상자를 띄워보내는 요게벳의 심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 있습니다.
다 장성하여 우리의 손을 떠나 있는 우리의 자녀들이지만 늘 아버지의 손이 우리의 자녀들을 덮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찬양을 듣습니다.